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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지 / 이혜경

40 그저 잠의 표면에 살짝살짝 얹혔을 뿐, 깊은 잠에 빠지지는 못했다. 67 김은 밤길을 걷고 있었다. 길가의 가게들이 다 문을 닫은 걸로 보아 밤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길이 환했다. 대체 무슨 밤이 이리 환한 걸까. 세상이 뒤집히려고 그러나. 빈 거리에 저벅저벅 울리는 자기의 발짝 소리가 무서웠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칼 든 사람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그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헛된 꿈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취한 듯 몽롱한 기분으로, 뭐에 씐 듯 걷고 있었다. 걷고 또 걷고 조금 쉬다 또 걷고, 어디론가 가야 했는데, 그 어디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걸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걸었다.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처..

후기/책 2021.05.30

죽은 자로 하여금 / 편혜영

40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만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44 권은 상대의 실수를 곧장 지적하고 틀린 걸 바로잡으려 했으며 생각 좀 하라면서 힐난조로 말했다. 55 할 수 있는 한 모조리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 선한 의지로 우정을 쌓아가고 순간적인 충동에 굴복하지 않고 신념과 신의를 지키고 동료와 신뢰를..

후기/책 2021.05.30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최헵시바 옮김)

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31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장에게 이미 그런 소리를 했던 게 기억나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조금씩 잘못이 있기 마련이었다. 57 그러자 사장은 생활이 변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이란 대개 생활을 바꾸기가 쉽지 않고, 어떤 생활이든 비슷비슷하며, 또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그렇게 불만이 있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58 저녁에 마리가 와서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사..

후기/책 2021.05.11

쇼코의 미소 / 최은영

47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한두 시간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48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껍데기만 보고 단죄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치솟을 무렵, 나는 그 사람들 편에 서서 엄마를 바라보지 않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엄마였다. 평생을 함께..

후기/책 2021.04.26

말린체 / 라우라 에스키벨 (조구호 옮김)

143 호기심이 발동한 소녀가 나비들이 계속 집에 머물면 항상 볼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제왕나비들은 수많은 새들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움직이는 바람을 따라 이동함으로써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새로워지고, 더 강해지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제왕나비들이 이렇듯 매년 여행을 하는 것은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었다. 먹이를 찾아, 겨울의 추위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후를 찾아 이동하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었다. 제왕나비들은 이런 식으로 삶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제왕나비: monarch butterfly, mariposa monarca) 162 말리날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고, 시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

후기/책 2021.04.14

버마 시절 / 조지 오웰

241 이 나라에서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그녀가 이해하는 것이 너무 중요했다. 또한 그녀가 씻어 줬으면 하는 그의 본질적인 외로움도 그녀는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그녀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비교할 대상이 그 무엇도 없다는 뜻이다. 규명될 수 있는 질병에 걸린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사랑으로 버림받은 자도 다행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고,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받지 않은 자들이 과연 이주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345 게다가 맥그리거 씨는 라틴어로 이런 말까지 했소. 라고 말이오. (역자 설명: 이 말은 프랑스의 화가 ..

후기/책 202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