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 이승우

lunadelanoche 2020. 11. 25. 16:36

32 희귀한 우연에 대한 끈질긴 사색은 운명론으로 유도되기 쉽다. 운명론은 종종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사랑의 중요한 동력인 개인의 욕망과 선택을 가린다. 운명적인 사랑이 운위되는 자리에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문장은 불순하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문장이 올바른 유일한 문장이 된다. 나도 그랬지만, 사랑에 빠져 들어가는 순간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운명론자의 영혼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평가와 판결의 영역에서 제외시킨다. 이제 사랑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찾아온 것이 되고,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면책의 특권을 갖는다.

68 사소한 기억들이 길 위에 뿌려졌다. 길들은 그 기억들을 모두 간직할 테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법은 알지 못하거나 표현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길 위에 흘린 기억들을 길이 간직된 그대로 되가져가지는 못한다. 길의 튼튼함과 안정감은 수많은 사람들이 쌓은 기억들의 충적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길 위에 기억을 쌓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전에 그 길을 걸어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쌓인 기억들을 밟고 가는 일이기도 하다. 걸을 때, 특히 두 사람이 어깨를 마주하고 몸을 스치듯 나란히 걸을 때 몸의 안쪽으로 표 나지 않게 스미는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은 그 길, 길이 간직한 기억들로부터 온다.

76 그렇게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의 파편들이 켜를 이루고 쌓이면 관계가 위험해진다. 그것 자체로는 거의 무게가 없는 잎 하나에 눈이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집을 무너뜨리듯이 그렇게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이 때때로 관계를 일그러뜨리고 삶을 부순다.

78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부터 내 공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침범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싫어했다.

150 그러니까 '보고 싶다'는 표면에 당의정이 처리된 소환 명령인 것이다.

151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마음과 욕망까지도 보였다. 그것이 상상이 현실보다 위험한 이유였다. 상상 속의 그림은 훨씬 세밀하고 더 구체적이고, 무엇보다도 집요하다. 그리고 질투는 그 부근에서 태어나고 활동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원근의 감각을 잃고 비정상적으로 확대된다. 질투란 실상 이미지의 집요한 공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을 황폐화시키고 균형 감각을 빼앗아 광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가령 그런 경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165 그리고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주문을 받으러 오고 차를 끓이고 차를 내왔다. 우리는 창가에 앉았다. 나는 모과차를 마시고 그녀는 국화차를 마셨다. 반투명 유리창은 바깥 풍경을 얼버무려서 보여주었다. 오래된 기억이나 꿈속의 영상처럼 그것은 좀 몽환적이었다.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