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 / 박경리
102 아따 긴 짐승도 한 여름 묵고 한 겨울 잠자는데 사램이 일 년에 한 분 묵고 우찌 살 기요. 검은 것도 흰 기라 카는 세상에 달을 해로 치믄 어떻고 열흘을 한 해로 친다 캐도 머가 그리 죄 되겄소. 일 년 열 두달도 다 사램이 맨든 기고 노래도 다 사램이 맨든 긴데 에누리 없이 사는 사람 있던가? 그래도 세상에는 거지겉이 선한 백성은 없을 기구마. 가진 기라고는 바가지 한 짝, 하루 한두 끼믄 고만 아니오? 집도 없고 절도 없고 풀잎을 이불 삼아 발 닿는 곳이 내 집인데 무신 탐심이 있겄소. 세상에 호강하는 연놈치고 도적질 안 하는 거 없이니께요. 안 그렇소? 아지매.
193 황금더미에 올라앉은 꿈을 꾸면서,
'누구 마음대로?'
평산의 꿈속에 미륵님이 나타나서 빈정거리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평산의 오산도 딱하기 한량없으나 미륵님께서도 적이 심술이 있으신 모양이다. 오색 무지개를 잡아보려고 기엄기엄 언덕을 기어올라가는데 이 불운한 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호랑이요 함정이라는 것을 한마디 귀띔도 없이 오히려 요만큼 더, 요만큼 좀 더, 손짓을 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차생의 일은 불문에 부치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신음은 볼 만한 구경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죄의 연대자가 아니로소이다.'
'나는 하수인과는 하등의 연고가 없소이다.'
'다만 구경을 했을 뿐이외다.'
시원한 얼굴로 뇌실지도 모를 일이다. 옛적에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의 고초를 함께 겪게 하시었다 하고, 석가여래께서는 다음 미륵불이 오시어 중생을 건지시리라 예언하시었는데 그때는 진금으로 땅을 깔 것이며 의식은 원하면 스스로 올 것이며 쾌락이 무량하고 남녀가 오백 세에 이르러 혼인을 하게 된다는 참으로 즐거운 세상이, 그러나 오십몇억 년을 기다리는 동안 미륵불께서는 곧장 구경만 하실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결같이 세상은 악역과 선역이 있어 늘 정해진 대본대로 움직이는 무대이며 인간은 광대인지도 모를 일이다.
196 일어난 수동이는 옷에 붙은 가랑잎을 떨고 어젯밤 불 피운 자리, 나무토막이 그 모양대로 재가 되어 있는 자리에 가랑잎을 한 줌 올려놓고 부싯돌을 부벼 불을 붙인다. 다시 토막나무를 올려놓고 불이 옮겨붙는 것을 지켜본다. 산막 안에 차츰 온기가 퍼져나간다. 지치는 일 없이 일각일각 굴러내리는 물소리, 소리에 소리가 이어져 끊임이 없다. 소리로 하여 더욱 적막한 산중의 아침을, 아침안개를 헤치며 수동이는 산막 밖으로 나갔다. 살갗을 에는 것같이 찬 기운이 목덜미에 와 닿는다. 노루와 달리 혼자 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는 고라니가 이번에도 두 마리 숲 사이로 숨어서 지나간다.
수동이는 우묵하게 덮은 철쭉가지를 휘어잡으며 이끼 낀 바위를 밟고 큰 개울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개울가로 내려간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하루키가 그린 주인공 남자아이가 생각났다. 도서관 함께 일하는 트렌스젠더? 남성? 여성?이 있으라고 한 숲 속 오두막 -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주 적막한 그러나 숲의 생기가 넘치는 앞쪽에 개울가도 있었고 - 에서 맨몸운동을 하는 주인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