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죽은 자로 하여금 / 편혜영

lunadelanoche 2021. 5. 30. 14:06

40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만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44 권은 상대의 실수를 곧장 지적하고 틀린 걸 바로잡으려 했으며 생각 좀 하라면서 힐난조로 말했다. 

55 할 수 있는 한 모조리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 선한 의지로 우정을 쌓아가고 순간적인 충동에 굴복하지 않고 신념과 신의를 지키고 동료와 신뢰를 만들어가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가족과 사랑을 나누고 나날의 삶을 좀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소소한 웃음과 농담과 잡담을 나눌 작정이었다. 

56 장래 로봇이 되고 싶다던 아이, 몸의 여러 곳이 제 기능을 못 해 꼼짝없이 누워 있는 아이, 머릿속으로 여전히 사고하고 상상할 아이, 희미하지만 굳세게 삶을 붙들고 있는 아이, 누워서도 조금씩 키와 머리카락과 손톱이 자라는 아이, 더러 따뜻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자동 반응 같은 미소를 지어 부모에게 끊임없이 갱생의 희망을 선사하는 아이,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아이. 그 아이를 떠올리면 당장 멈추고 싶어졌다. 

82 최선을 다해 바르고자 했고, 가급적 이석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던 무주의 노력은 변명의 여지없이 공명심에 눈먼 비열한 행동으로 비칠 것이다. 

사무장의 말과 행동을 정확히 기억하기 쉽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니 꾸매낼 수도 없었다. 무주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꾸매내다' 라는 단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오타인가보다)

88 본래 동상 든 손은 눈 속에 파묻어야 다시 피가 돈다고 하지 않는가. 

90 헛된 공명심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벌인 일을 아내에게 말하기 두려웠다. 

95 무엇을 위해 이석을 고발할 작정을 한 건지, 어떤 공명심과 정의감에 홀린 건지 의아해졌다. 무주는 환상과 무지의 장막 아래에서 싸구려 도덕심에 고취되어 있었다. 비밀을 알고 있다고 느낄 때에는 비리를 저지르고 묵인한 사람이 이 세상의 타락과 부패를 주도했다고 믿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이 옳았다. 바리새인이 된 기분이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예수의 손에 못을 박아 넣은 게 아니었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자기 힘으로 덕 높고 훌륭한 인간이 되려 했다는 점에 있었다. 

103 박이 "안 그래?" 하며 건너편 여직원에게 물었다. 여직원이 일어서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흰소리려니 했는데, 박이 여직원을 향해 코웃음을 치고는 무주에게 야간 근무를 전담하라 일렀다. 

116 어두운 밤이면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집에서 작게 기침만 해도 소리가 벽을 타고 퍼졌다. 공동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사방 어디에서고 생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온전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창고나 컨테이너같은 임시 시설에 기거하는 기분이었다. 

117 유령 같은 도시를 배회하느니 아픈 사람이 가득 들어찬 병원 창구에 앉아 있는 게 나았다. 적어도 병원은 바깥 거리처럼 황량하거나 적막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가책을 느끼거나 외로운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책은 아무리 심해도 육체적 통증을 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기도 했다. 

166 왜 어떤 삶은 굴욕과 함께 지켜내야 하는 걸까. 

213 오랜 시간 함께해왔고, 지금도 함께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게 분명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