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최헵시바 옮김)

lunadelanoche 2021. 5. 11. 11:02

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31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장에게 이미 그런 소리를 했던 게 기억나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조금씩 잘못이 있기 마련이었다. 

57 그러자 사장은 생활이 변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이란 대개 생활을 바꾸기가 쉽지 않고, 어떤 생활이든 비슷비슷하며, 또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그렇게 불만이 있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58 저녁에 마리가 와서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나랑 결혼할 생각을 하죠?"
 마리가 말했다. 나는 다시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며, 원한다면 결혼을 하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결혼을 하자고 한 것은 마리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마리는 결혼이란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라고 나를 나무랐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자기처럼 만난 다른 여자가 청혼을 해도 승낙을 했을지 물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가 아주 이상한 사람이고, 그 때문에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66 우리는 알제 교외에서 내렸다. 바닷가는 정류장에서 가까웠다. 하지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작은 언덕을 지나야 했다. 언덕은 높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돌과 하얀 수선화로 뒤덮여 있었다. 마리는 재미있다는 듯 가방을 휘둘러서 꽃잎을 떨어뜨렸다. 
 우리는 흰색과 초록색으로 울타리를 둘러 친 작은 별장들 사이로 지나갔다. 어떤 별장들은 베란다까지 버드나무 속에 파묻혀 있었고, 어떤 것은 돌들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했다. 언덕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벌써 잔잔한 바다가 보였고, 더 멀리 맑은 물속에는 육중한 곶이 졸고 있는 듯했다. 정적 속에서 경쾌한 모터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반짝이는 바다 위로 조그만 트롤 어선 한 척이 느지막이 가고 있었다. 

76 그렇지만 더위가 무척이나 지독해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있으니 눈이 멀 것처럼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서 있는 것이나 가버리는 것이나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조금 뒤에 나는 다시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시뻘건 햇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바다는 모래 위에 잔물결들을 토해 내며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 쪽으로 걸었는데 햇볕 때문에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더위가 나를 짓눌러 대면서 발걸음을 막았다. 얼굴 위에 무더운 바람이 와 닿을 때마다 이를 악문 채 바지 주머니 속의 주먹을 움켜쥐었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내는 알지 못할 현기증을 이겨내려고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모래나 흰 조개껍데기, 유리조각이 뿜어내는 빛이 칼날처럼 번쩍일 때마다 양쪽 턱뼈가 움찔거렸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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