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기억의 습지 / 이혜경

lunadelanoche 2021. 5. 30. 21:02

40 그저 잠의 표면에 살짝살짝 얹혔을 뿐, 깊은 잠에 빠지지는 못했다.

67 김은 밤길을 걷고 있었다. 길가의 가게들이 다 문을 닫은 걸로 보아 밤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길이 환했다. 대체 무슨 밤이 이리 환한 걸까. 세상이 뒤집히려고 그러나. 빈 거리에 저벅저벅 울리는 자기의 발짝 소리가 무서웠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칼 든 사람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그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헛된 꿈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취한 듯 몽롱한 기분으로, 뭐에 씐 듯 걷고 있었다. 걷고 또 걷고 조금 쉬다 또 걷고, 어디론가 가야 했는데, 그 어디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걸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걸었다.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무릎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왔다. 이제 더는 못 걷겠구나. 거기에 이를 수 없겠구나. 절망이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그 검은 연기가 세상을 뒤엎어 그는 캑캑거렸다.

92 공기가 부옜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앵커들이 높은 목소리로 미세먼지를 걱정했다. 마당에만 나갔다 와도 목이며 눈이 뜨끔뜨끔했다. 그는 짐짓 무시해버렸다. 담배도 피우는데 뭘, 하면서. 고엽제 피해을 입은 전우들의 부음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는 순동이 밥을 주기 위해서라도 밥을 챙겨 먹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에 텔레비전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젊은이들이 나와 찧고 까불었다. 그들이 웃는 걸 보면 잠시라도 삶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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