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침입자들 / 정혁용

lunadelanoche 2022. 3. 10. 09:33

12 '제길, 그래도 치나스키보다는 나은가?'라고 생각했다. 비 내리는 새벽의 뉴올리언스에 내린 건 아니니까.

49 "언젠가 읽은 것 같은데 코알라는 스물네 시간 중에 스물세 시간을 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음, 너도 스물세 시간을 쓰는 것 같아."
"뭘?"
"얘기하는 데."
나의 대답에 주창이가 한참을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 대답했다.
"괜찮은데. 코알라. 마음에 들어."
의외의 반응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이 나빴을 텐데 말이다. 내 많은 단점 중의 하나다. 굳이 물으면 굳이 속마음을 말해버리는 것. 비아냥거리는 성격이라는 얘길 많이 듣고 살았는데 어쩌겠는가. 벤댕이 소갈딱지인 것을. 하지만 아주 드물게 개의치 않는 성격의 사람을 만나곤 했는데 주창이가 그런 것 같았다.

162 "내겐 그저, 낡은 외투에 반쯤 벗겨진 머리, 퀭한 눈과 짙은 주름, 아무렇게나 기른 것 같은 수염을 보고 있자면 목욕을 시킨 노숙자 같던데. 하지만 어딘가 분위기는 좀 있어 보이긴 해. 말을 걸면 딱 이렇게 말할 것 같아. '이보게, 원한다면 얘기를 좀 들어줄 수 있네. 인간의 비열함이나 비천함, 천박함과 나약함이라면 내가 좀 안다네. 비참함과 가난이라면 내가 좀 겪었거든.' 그런 다음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금 쑥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할 것 같아. '그런데 자네 돈 좀 있나? 몇 푼쯤 쥐어주면 좀 더 편하게 얘기를 해줄 수 있을 듯하군.' 뭐 딱 그런 이미지가 떠올라. 물론 그 돈을 받으면 얘기고 뭐고 냉큼 도박장으로 달려갔을 테지만."

165 사람이 쓸쓸한 얼굴로 얘기할 때는 들어야 한다. 아무리 아프고 서러운 얘기라도 세상사에서는 흔한 얘기일 테지만, 그 사람에게는 유일한 얘기일 거니까. 그게 예의다. 그런 장점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단점만 185,403개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가끔이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들었다.

193 한 줌의 위로, 먼지만 한 한 줌의 위로만을 원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218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한 이유는 단순히 종교가 아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223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죠. 하지만 실제로 자유를 감당할만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왜인지 아십니까?" (...)
"자유의 대가는 공포니까요. 생계의 공포. 인간관계에 있어 고립의 공포. (...)"
"현대 교육의 핵심은 야성의 제거예요. 노예에게 야성이 있으면 다루기 힘드니까. 집에서 기르는 개와 마찬가지죠. 먹이를 주고 쥐꼬리만 한 안정감을 쥐여주면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부려 먹을 수 있죠. 교육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 경쟁을 시키고 서열을 주면 알아서 서로를 증오하며 끌어내리고 밟고 올라서기 바쁘죠. 그러면서 태연한 얼굴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건 자유라고 말하죠. 자유가 어떤 건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322 부코스키는 <팩토텀>에서 이렇게 썼다.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인간이 자명종 소리에 새벽 여섯시 반에 깨어나, 침대에서 뛰쳐나오고, 옷을 입고,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장소로 가기 위해 교통지옥과 싸우고,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단 말인가?'
일어날 침대도, 이를 닦고 빗질할 시간도 없지만,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내가 동의한다 해서 그의 말이 진리는 아니며, 조 따꺼와는 일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를 뿐이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정의는 이렇다. 이제부터 남의 말을 듣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논쟁으로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조 따꺼나 나나. 그러니 대충 고개나 끄덕이고 자리나 모면하는 게 상책이다.

https://youtu.be/rIyn-ZQXmMg

https://youtu.be/ohk3DP5fMCg


작가의 말
커트 보네거드가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은 생계 수단이 아니다.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은 진짜 인간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적어도 내게는. 예술이 내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줬다. 성장은 나와 관련 없는 이야기 같고. 아무튼,

이 소설이 당신이 삶을 견디는 데 먼지만 한 위로라도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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