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아리스토텔레스x조대호 (아르테, 2019)

lunadelanoche 2023. 6. 29. 20:56

158 '명예를 추구하지 말라'고 가르치기보다는 '명예를 올바로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교육이지 않을까? 일리아스는 이런 교육에 가장 알맞은 책이었다. 교육은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순화된 실현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자신이 타고난 성질을 부정하라는 교육에 사람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같이 성격이 강한 인물이라면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160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동 경로는 대개 비잔티온과 흑해의 남쪽 및 북단에 걸쳐 있다.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거쳐 흑해 건너 크림반도 근처까지 갔다는 것이다. 
182 뤼케이온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연구한 사람들은 '페리파테티코이Peripatetikoi'라고 불렸다. '소요학파'라는 한자어 번역은 마치 신선 모임 같은 탈속의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그리스어의 본뜻은 단순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페리파토스peripatos' 즉 '둘레길'을 오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페리파토스는 모든 둘레길을 가리킨다. 
185 새로운 세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새 학교로 몰려들었다. 크세노크라테스나 아카데미아의 구성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그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 없이는 진리를 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택했다. 철학자로서 그에게는 친구와 진리가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91 사람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앎을 얻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한 이론학은 이런 인간 본성의 표현이다. (...) 그에게 자연에 대한 앎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 인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학문이었다. 
223 인간에 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서양의 중세 이후만 보더라도, 인간을 신 앞의 죄인으로 자연의 정복자로 영장류의 한 종으로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했고, 이에 따라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21세기에 들어 인간에 대한 이해 방식과 질문의 방향은 또다시 변화했다. 인간에 대한 우리 시대의 질문에는 초조와 불안의 기색이 역력하다. 기술이 고민거리다. 인간을 기술을 통해 육체노동에서 벗어났지만, 해방과 함께 할 일을 잃었다. 
235 '위험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영리하다' '섬뜩하다'는 뜻의 '데이노스deinos'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계획하는 숙고의 능력을 일컬어 '데이노테스'라고 했다. 이 능력을 좋은 목적으로 활용하면 실천적 지혜가 되지만, 악용하면 법과 정의를 무시한 채 만행을 저지르는 '판우르기아panourgia', 즉 악랄함이나 교활함이 된다. 인간은 지성의 능력 덕분에 자연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섰지만,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추락의 위험성을 항상 안고 산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정치와 윤리는 인간의 삶에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사치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지 않고 지성적 존재로서 잘 사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 각각 개인과 국가 공동체의 수준에서 어떻게 인간이 잘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 
239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말로 가리키는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라 '잘 삶' 또는 '잘 행동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미권 학자들은 이 말을 영어로 옮길 때 '행복happiness'보다 '번성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flourishing,thriving를 선호한다. 주관적 감정 상태보다는 객관적 상태나 활동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씨를 남겨 본성을 실현한다. 우리가 이런 식물을 보고 '잘 산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잘 사는 식물도 즐거움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동물이 '잘 산다'고 할 때는 생명을 잘 유지하고 번식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놀고 활동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240 지성을 '감정의 노예'라고 정의한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처럼 우리는 지성이 동물적 욕망을 채우는 데 수단 구실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지성은 동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찾을 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욕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지성은 더 많은 것, 더 나은 것에 대한 상상을 불러내면서 욕망을 무한대로 부추길 수 있다. 무한한 부, 무한한 권력, 무한한 삶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 이 욕망이 다시 지성을 도구로 이용한다. 지성과 욕망은 이렇게 서로 맞물려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최악과 최선의 가능성은 무엇을 어떻게 욕망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달린 셈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과제는 지성적 존재인 인간의 이런 양면성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인간이 본성적 능력을 잘 실현해 잘 살 수 있는지, 이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욕망을 조절해서 행동의 목적을 올바로 세울 수 있게 하는 '아레테arete'와 이렇게 정립된 목적을 잘 실현시키는 '실천적 지혜phronesis'에서 잘 삶의 원리를 찾았다. 
255 그리스에서 관광업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지만, 그저 '한철 장사'일 뿐이다.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몇 달을 빼면 많은 관광지가 말 그대로 철 지난 바닷가로 바뀐다. 아테네를 제외한 여러 관광지의 호텔들이 한 해의 절반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아테네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는 택시에서 만난 점잖고 친절한 기사는 이런 상황을 "관광객이 없으면 경제도 없다"는 스파르타식 단문으로 표현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면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져서 먹고산다"는 칼로니의 인텔리 어부 디미트리의 말이 함께 떠올랐다. 
312 테오프라스토스가 넬레우스에게 기록을 맡긴 것이 문제였다. 뤼케이온의 교장이 되지 못한 넬레우스는 화가 나서 고향 스켑시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료들을 가져갔고, 그의 후손들은 그것을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는" (스트라본, 지리학 8 1) 지하 창고에 방치했다고 한다. 지하실에 처박힌 저술에 사람들의 눈이 미칠 수 없었다. 이 문헌들은 아펠리콘이라는 소장가에게 팔려 아테네로 돌아왔다가 기원전 86년에 아테네를 정복한 로마 장군 술라의 손을 거쳐 로마로 옮겨진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뤼케이온을 폐허로 만든 장본인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세계 제국의 도시로 건너간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은 그곳에 머물던 로도스 출신 안드로니코스의 손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그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전집Corpus Aristotelicum'이 편찬되었다. 안드로니코스는 편집 과정에서 자연에 관한 글들을 함께 묶은 뒤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글들을 모아 '자연학 뒤에 오는 글들ta meta ta physika'로 엮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우리가 아는 형이상학이다. 기원전 40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떠나고 벌써 280년이 지났을 때다.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안드로니코스가 펴낸 전집을 통해 르네상스를 맞았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그리스어, 시리아어 등 여러 언어로 주석서들이 쓰였다. 3세기까지는 페리파토스학파 철학자들이, 그 뒤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주석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쓰인 많은 주석서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플라톤의 철학과 조화시키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 가운데 몇몇은 529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아카데미아가 폐쇄되자 페르시아로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전통을 이어갔다. 아랍인들이 아라비아반도로부터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부 스페인까지 세력을 넓힌 8세기까지 그의 저술을 번역해서 오롯이 보존한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의 연구자들이다. 
316 20세기 중반 이래 윤리학의 지배 담론으로 부상한 덕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직계 후손이다. 행위 주체의 조건을 무시한 채 어떤 행동이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지, 예컨대 그 행동이 보편타당한지 또는 유용성이 있는지 등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근대의 윤리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윤리학은 이제 '덕 윤리'라는 이름으로 행위 주체의 조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현대 윤리학은 이렇게 해서 행동을 행위자의 습성을 통해 설명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돌아갔다. 덕 윤리학이 부활하면서 도덕 심리학, 즉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 주체의 심리적 조건에 대한 연구도 대세가 되었다. 21세기 도덕 심리학은 영혼론 등에 담긴 의식 작용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들을 길잡이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319 아리스텔레스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눈을 연다는 뜻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배운다는 의미다. 수많은 이론들에 현혹되는 우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관찰하고 또 관찰하라!'

본문 일러스트 최광렬 / 디자인 박대성
표지 그림 크레타섬의 크노소스궁전에 그려진 고대 돌고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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