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정말로 진실하고 성실한 영혼들은 이러한 분류와 질서의 시스템이 대항할 수 없는 것으로서, 뒤흔들거나 제거한다는 것은 더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마르크스는 최후의 낙관론자였지만 형편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벤야민은 평생 분류되거나 어떤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남들이 주장하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아주 작은 '사적 공간'뿐이었다.
25 위대한 세계 혁명이 이 모양으로 위축되어버린 데 대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벤야민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들의 난처한 처지를 잘 이해할뿐더러 우리 능력의 한계를 동정하고 있으며, 우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추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이 실천할 만하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 원해서 교회가 명령한 모든 벽화를 그려낸 것이 아니며, 모차르트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궁정 연회를 위한 무도곡을 준비해야 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는 아주 오랫동안 부득이하게 자신이 원치 않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야 했다. 한동안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백과사전 판촉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26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거대한 세계는 분류와 분업이 효과적으로 조직된 사회로서 기본적으로 목적성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 공리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사회는 그 거대한 조직이 원하는 우리의 일부만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유용한' 사람의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유용함을 위해 힘들게 일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면 남는 시간에도 자신을 쓸모 없고(비도구화된) 편안하며 자유로운, 완전한 인간으로 환원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아마도 무한하고 제한이 없는 절대적 자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통상 우리에게 유효한 자유는 상대적으로 제한에 대해 깨닫고 장악할 수 있는 자유, 제한을 요리하여 쟁취하는 자유일 것이다. 일정 정도의 제한이 있을 때, 그 제한 바깥이 바로 자유인 것이다.
서와 책은 마구 움직인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고 손길이 미치지 않는 책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분류의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책들은 독서 행위를 통해서만 가장 편안하고 적당한 위치를 찾는다. 이렇게 배려를 받는 대상은 책이지만 실제로 진정으로 해방되는 것은 책을 읽는 사람 자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편안하고 적당한 자리는 필연적으로 복수의 형태를 갖고 줄곧 변화한다. 진정한 독서활동은 단선적이고 전문적인 학습(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의 활동의 연장이나 추가 근무, 혹은 적어도 유용한 사람을 연기하기 위한 적극적인 준비로 간주될 수 있다)과 다르다. 그런 까닭에 독서는 마르크스의 혁명 이후 분업 시장이 붕괴되고 천국이 강림하여 '오전에는 시를 쓰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는' 준유토피아식 서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사회의 인정과 기대, 명령 등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사적 기호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각자 복사되는 인간의 감관 능력은 하나의 위도를 갖지 않는다.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가정의 모습도 상상해볼 수 있다. (...) 내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한 종류의 책만 꽂혀 있는 서재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상황이다.
28 독서는 고정된 사회 분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 각자의 서로 다른 심리 상태에 따르므로, 두 점 사이를 한정되지 않은 직선으로 연결하듯이 이론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유형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의자 본인만의 독특한 생각과 관점, 미묘한 온도 차가 있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새로운 색깔을 입히게 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답안은 항상 수십 권 내지 수백 권에 달하는 책 속에 흩어져 있다. 한 가지 생각과 의문을 책 속에 던져넣는다면 책은 곧 하나의 여정이 될 것이다. 전국 시대의 굴원처럼 평생을 쉬지 않고 해답을 찾는 데 몰두할 수도 있고 동진시대에 해질 무렵이면 목 놓아 울었던 시인 완적처럼 고함을 치면서 중단할 수도 있다. 책의 세계에서 우리는 프리맨, 자유인이다. 마지막 한마디는 우리 스스로 내뱉는 것이다. 우리가 불필요한 유혹을 금할 수만 있다면 별로 관심이 없는 답안도 그 다음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0 반세기 전에 레비스트로스도 이러한 낯선 세계로의 추락이 개성 없고 모든 사람의 일치를 추구하는 재미없는 세상을 피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자구책이라고 생각했다.
31 우리는 줄곧 분류에 대항해온 서재 안에서 또다시 '질서'라는 단어와 맞닥뜨린다. 그렇다. 질서는 유령과 같아서 없는 곳이 없다. 아무 때나 서재의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다. 질서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하기만 하면 책이라는 바다에서 이를 길들일 수 있다. 일단 길들여지면 램프 안에 갇혀 있는 거대한 요정처럼 생김새는 무섭지만 친절한 어투로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램프의 요정을 꿈꿔봤을 것이다. 이 세계는 아직 우리의 유년 시절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분류와 질서를 없애버리기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우리가 혼돈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방법이며 사유를 펼쳐나가는 경로이자 그 조직 방식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유와 절대적인 무질서라는 것은 무척 끌리는 경지이긴 하나 그 실천에 있어서는 서재에 있는 어느 책에서도 문제를 찾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유가 발생할 수도 없고, 발생하더라도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와 관련하여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형태는 신학이지만 실제로는 기호학에 속하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만일 신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한다면, 이는 곧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따라서 서책이 어지럽게 널린 서재에도 질서는 존재한다.
36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자 이번에는 토크빌의 책이 알렌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자 논고' 위에 놓인다. 내일 아침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다. 토크빌의 임무는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유용'하다. 그래서 잠시 서가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직은 완전한 자유라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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