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다른 강사들의 얼굴이나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의 얼굴, 그의 건조한 목소리, 베오울프나 초서의 어떤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깎아내리는 말 등은 항상 스토너의 의식의 문턱에 걸려 있었다.
20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22 그때의 시간은 익숙하게 흐르지 않고 발작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돌아가는 커다란 디오라마를 보듯이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24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25 땅과 똑같은 갈색을 띠고, 땅처럼 수동적이던 사람.
36 스토너가 학사학위를 받고 2주 뒤에 프란시스 페르디난드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가을이 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37 열심히 책에 몰두하다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아직 책에서 읽지 못한 것이 한꺼번에 의식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울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그토록 애써 손에 넣은 평화로운 시간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38 그는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 일주일 동안 강의계획을 짜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보게 마련인 가능성들을 보았다. 우선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39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수업 중에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작성한 과제물에 만족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어린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과제물에는 그가 마음 깊숙이 알고 있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았다.
43 하지만 자네도 세상에 나가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머리는 있지. 딱 그만큼만. 자네는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고, 자네도 그걸 알고 있어. 비록 개자식처럼 굴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항상 그렇게 굴 수 있을 만큼 막돼먹지는 않았거든. 딱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자네가 가장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영웅적인 수준으로 부정직한 것도 아냐. 일할 능력은 있으나 게을러서 세상이 원하는 만큼 근면하게 일하지는 못하지. 하지만 자신의 중요성을 세상에 각인할 수 있을 만큼 게으르지도 않아. 게다가 운도 없고. 음, 그런 편이지. 특별한 기세를 내뿜지도 않고, 항상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어. 세상에 나가면 항상 성공의 언저리에 서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파멸할 걸세.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선택된 사람이지. 신의 유머감각은 항상 재미있어. 신의 섭리가 자네를 세상의 턱 앞에서 낚아채 여기에 안전히 놓아준 거야. 자네 형제들 속에.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푸른 하늘 밑에서 뛰놀고 있지.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오래된 약점.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47 자신의.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49 세상을 한 바퀴 휙 돌아보고 이 폐쇄된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는 서서히 사멸해 가는 운명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52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인류가 겪은 전쟁과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
53 조용한 방과 책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바깥세상에서 멀게 들려오는 학생들의 고함소리, 벽돌로 포장된 길에서 따각따각 빠르게 마차가 달리는 소리, 시내에 열 대 남짓한 자동차의 단조로운 엔진소리 등이 아주 가끔씩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57 멋대로 헝클어져 있던 강철색 곱슬머리가 이제는 하얗게 변해서 뼈만 남은 머리 위에 생기 없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검은 눈도 습기의 막이 한 커풀 씌워진 것처럼 흐릿해졌다. 길고 주름진 얼굴이 예전에는 얇은 가죽처럼 강인해 보였지만, 지금은 아주 오래돼서 바짝 말라버린 종이처럼 약해 보였다.
81 그들은 여러 방을 한들한들 통과해서 커다란 응접실에 들어섰다.
91 2월 오후의 차갑고 맑은 햇빛이 달리의 집 앞쪽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다가 커다란 거실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몸에 부딪혀 깨어졌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마치 두꺼운 천으로 여러 겹 덮여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96 작은 소파에 긴 몸을 뻣뻣하게 웅크린 채 잠을 이룰 수 없어서 그의 눈은 지나가는 밤을 향해 열려 있었다.
114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바스락거리는 인동덩굴의 섬세한 이파리들에 섞여 따스한 공기 속에서 흔들리는 층층나무의 달콤한 냄새가 사방에 짙게 깔려 있었다. 흐릿한 글자들을 집중해서 읽느라 눈이 따가웠고, 머릿속에는 방금 읽은 내용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137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140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들어다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142 의자에 어색하게 앉아 그의 서재에 대해 말을 던지거나 딸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학생들을 보면 서투른 애정이 느껴졌다. 그는 아내가 학생들을 맞으러 나오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그녀가 아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렇게 거듭 사과하는 것이 아내의 부재를 설명해 주기보다 오히려 강조한다는 사실을 그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자신의 침묵이 설명보다 덜 구차하기를 바랐다.
145 마치 그 목소리가 귀에 대고 있는 수화기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160 아버지는 분빌 외곽의 작은 무덤에 묻혔다. 윌리엄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마다 일하던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른 흙 한 덩이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스러뜨리며 달빛 속에서 어둡게 보이는 흙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바지에 손을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틀 때까지. 땅 위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척박한 회색 땅이 그의 앞에 무한하게 펼쳐질 때까지.
158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170 이 일의 중대한 의미가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여러 주가 지난 뒤에야 이디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인정하는 순간이 왔을 때에는 놀라움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디스가 워낙 영리하고 노련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행동에 불평을 늘어놓을 합리적인 근거를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녀가 그날 밤 거의 난폭하게 보일 정도로 갑작스레 그의 서재에 들이닥친 일을 되돌아보니 마치 기습공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이디스는 그보다 간접적이고,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전략을 사용했다. 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쓴 전략이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
253 그가 지켜보는 동안 제시 홀의 그림자가 직사각형 안뜰 한복판에 강하지만 고독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서 있는 다섯 기둥의 뿌리 가까이까지 옮겨가 있었다. 안뜰 중에서 그림자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은 어렴풋이 갈색을 띤 짙은 회색이었다. 그림자 너머의 겨울 잔디밭은 밝은 황갈색이었지만, 연하디 연한 초록색이 아주 흐릿하고 얇은 막처럼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대리석 기둥들은 제 몸을 거미줄처럼 휘감은 검은 덩굴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곧 그림자가 저 기둥들 위로 기어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기둥의 뿌리 부분 지금보다 더 어두워질 것이고, 그 어둠이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더 빨리 위를 향해 기어올라서 마침내...... 그는 누군가가 등 뒤에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262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절망이 그토록 무거웠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말했다.
270 그가 줄곧 어두운 갈색이나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가끔 그 눈동자에 어둑한 램프 불빛이 닿으면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였다.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그 눈동자의 색깔이 바뀌었다. 가만히 쉬고 있을 때조차 그 눈동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볼 때는 아주 서늘하고 창백했던 그녀의 피부는 은근히 따스하고 불그스름한 혈색을 띠고 있어서, 반투명한 우윳빛 피부 밑에 빛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273 그녀의 몸은 길쭉하고 섬세했으며, 부드럽지만 격렬했다. 그가 어색한 손길로 그녀의 몸을 만지면, 그 살결 위에서 그의 손이 생명을 얻었다. 때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훌륭한 보물을 보듯이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한 분홍색을 띤 허벅지와 배의 촉촉한 피부 위에서 뭉툭한 손가락을 놀리며 작고 단단한 젖가슴의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섬세함에 경탄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타인의 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자아와 그 자아를 담고 있는 몸을 항상 분리시켜 보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은 타인에게 진정한 친밀감이나 신뢰나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최종적인 깨달음에 이르렀다.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은 자신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그런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275 그 덕분에 그는 자신과 그녀가 서로 사귀기 전에는 그녀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293 두 사람은 빛이 절반밖에 들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자신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깥세상, 변화와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는 그 세상이 비현실적인 거짓 세상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이 두 세계에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늦겨울과 초봄에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요함을 맛볼 수 있었다. 바깥세상이 점점 조여 들어오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세상의 존재를 덜 의식하게 되었다. 함께 느끼는 행복이 너무 커서 바깥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작고 침침한 캐서린의 아파트, 육중하고 낡은 주택 밑에 동굴처럼 숨어있는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벗어나 자기들이 직접 발견한, 시간을 초월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341 결혼식은 치안판사의 지저분한 서재에서 치러졌다. 증인은 윌리엄과 이디스뿐이었고, 항상 찌푸린 표정을 하고 옷차림이 헝클어져 있는 백발의 판사 아내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증인으로 서명해야 하는 순간에만 잠깐 밖으로 나왔다. 춥고 황량한 오후였다. 날짜는 1941년 12월 12일.
결혼식 닷새 전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윌리엄 스토너는 전에 없이 엇갈린 심정으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멍한 상태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주 깊고 강렬한 여러 감정들이 그 안에 혼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의 무게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인들에 관한 느낌도 한층 강렬해졌다. 사막에 홀로 솟아 있는 무덤이 바로 주위를 둘러싼 광활한 사막 때문에 더욱 외롭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무심함에 가까운 연민을 안고 그는 그 슬픈 결혼식을 지켜보며 딸의 얼굴에 나타난 얌전하고 무심한 아름다움과 청년의 얼굴에 나타난 뚱한 절망에 묘한 감동을 느꼈다.
342 결혼식이 끝난 뒤 두 젊은이는 전혀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프라이의 작은 무개 자동차에 올라 세인트루이스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청년의 부모를 만난 뒤 자리를 잡고 살게 될 터였다. 스토너는 아이들이 차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집 안에서 지켜보았다. 그 옛날 방에서 그와 나란히 앉아 엄숙하고 기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딸의 모습,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그 사랑스럽고 작은 아이의 모습만이 머리에 떠오를 뿐이었다.
결혼식 두 달 뒤 에드워드 프라이가 군에 입대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세인트루이스에 남아 있겠다고 결정한 것은 그레이스 본인이었다. 6개월도 안 돼서 프라이는 태평양의 작은 섬 바닷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일본군의 진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보기 위해 파견된 새파란 신병들 중 하나였다. 1942년 6월에 그레이스의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 사랑하지도 않을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주었다.
그해 6월에 딸을 '돕기'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간 이디스는 컬럼비아로 돌아오라고 딸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레이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작은 아파트, 프라이의 보험에서 나오는 소액의 수입, 시부모가 있었다.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아이가 좀 변했어요." 이디스가 괴로운 표정으로 스토너에게 말했다. "우리의 귀여운 그레이스가 아니에요.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힘든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래요."
343 전쟁이 벌어진 몇 해 동안은 시간이 흐릿하게 한데 뭉쳐서 흘러갔다. 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을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인내심과 무신경함으로 하루를 보내고 몇 주를 보내면서도 그의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 마음 한쪽은 매일 헛되이 스러지는 생명, 냉혹하게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는 수많은 파괴와 죽음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도 교수진이 고갈되었고, 강의실에서 젊은 청년들이 사라졌으며, 남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그 얼굴들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마음, 모질게 마모되어 사라지는 감정과 애정을 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구석은 그가 움츠리며 피한 그 학살을 향해 강렬히 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도 몰랐던 폭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그 일에 참여하기를 갈망했으며, 죽음의 맛과 쓰라린 파괴의 기쁨과 피의 느낌을 원했다. 그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한 자신과 이 시대, 그리고 자신 같은 인간을 만들어낸 주변 상황에 쓰디쓴 실망을 느꼈다.
매주, 매달, 죽은 자들의 이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개중에는 먼 과거의 기억처럼 단순히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동안 내내 그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지만, 때로는 맹렬한 폭풍 앞에서 등을 구부리는 것이나 질 나쁜 성냥의 흐릿한 불꽃을 양손으로 오목하게 감싸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46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셔요." 그녀가 말했다. "가엾은 아버지. 모르셨죠?"
"그래." 그가 말했다.
"매주 저는 이렇게 다짐하죠. 다음 주에는 술을 많이 마시지 말아야지. 하지만 항상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돼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너 불행하니?" 스토너가 물었다.
"아뇨. 행복한 것 같아요. 뭐, 어쨌든 거의 행복해요. 그래서 마시는 게 아니라……"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347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 것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348 유행이나 관습에 무지한 그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는 스토너가 예전에 꿈꾸던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361 병원에서 받아온 알약을 먹으면 조금 어지러웠는데, 그 느낌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371 박수소리가 나고, 그가 앉았다. 고든의 반대편에 있던 총장이 일어나 감언에서 위협으로, 유머에서 슬픔으로, 안타까움에서 기쁨으로 쪼르르 쪼르르 오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스토너의 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없는 대학은 예전보다 못한 곳이 될 것이라면서 전통의 중요성과 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모든 학생들이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토너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총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커다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누군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380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떠난 뒤 조급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별로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384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진한 검푸른 색 공간. 구름 속에서 가느다란 달빛이 보였다. 아주 늦은 시간인 것 같았다. 밝은 오후의 햇빛 속에서 고든과 이디스가 옆에 서 있던 것이 조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나? 그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몸과 함께 머리도 틀림없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은 강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항상 계속 살아가려고 하지.
목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보이더니 통증이 오락가락했다. 이디스의 얼굴이 위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미소 짓는 것을 느꼈다. 가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디스의 손이 그의 몸을 오가며 씻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디스에게 다시 아이가 생겼군. 그는 생각했다. 이제야 저 사람이 돌봐줄 수 있는 아이가 생겼어.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생각했다.
뭔가 무거운 것이 그의 눈꺼풀을 누르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가 힘들게 눈을 떴다. 그가 느낀 것은 빛이었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는 눈을 깜박이며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 가장자리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을 움직여 보았더니 몸속에 묘한 힘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 중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통증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운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살갗이 찌릿찌릿했다. 얼굴에 닿는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이제 문 밖의 모습이 보였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늦봄 또는 초여름……. 풍경을 보니 아무래도 초여름이지 싶었다. 뒷마당의 커다란 느릅나무 이파리들이 풍요롭게 반짝였다. 그 느릅나무 그늘은 그도 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깊이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공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풀과 이파리와 꽃의 향기로운 냄새에 묵직함이 잔뜩 섞여서 그 향기들을 허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깊숙이. 긁히는 것 같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여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그 들숨과 함께 자신의 안쪽 깊숙한 곳 어딘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뭔가를 멈추게 하고, 그의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해 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 느낌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느낌이구나.
이디스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 몇 명이 뒷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모두 세 쌍이었다. 여학생들은 팔다리가 길었으며, 가벼운 여름옷을 입은 모습이 우아했다. 남학생들은 즐겁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 거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다. 그래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는 시야를 점점 벗어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여름날 오후에 어딘가 멀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터뜨리는 웃음소리.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주위가 부드러워지더니, 팔다리에 나른함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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