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lunadelanoche 2020. 11. 24. 11:12

9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뱉는 순간 허공에 흩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장 깊은 안쪽에 가만히 모아두고 싶다. 그것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30 함께 남자 쪽 친척의 결혼식엘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남자가 여자를 그런 자리에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여자는 알고 있었어. 그런 건 꼭 말로 듣지 않아도 알게 되는 법이니까. 평소 같으면 여자는 구태여 따라나서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달랐어. 이상하게도 꼭 한 번은 막무가내로 남자를 따라나서고 싶었던가 봐. 친척들에게 여자가 누구인지 소개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어. 축의금 봉투를 내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과 안부를 나누는 남자 옆에 그저 그림자처럼 서 있고 싶었지. 한 번은 그래 보고 싶었어. 오기 같은 거라고 해도 좋아. 여자는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예쁜 옷으로 차려입고 정성껏 화장도 하고 문간에 서서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렸어. 그런 여자를 보고도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
볕이 좋은 날이었어. 그 사람하고 그때까지 2년을 넘게 살았는데, 동네 밖에 같이 나가는 것이 처음이었지. 여자는 지하철을 타자고 했지만 남자는 콜택시를 불렀어. 식장에서 남자는 축의금 봉투를 내고 친척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었어. 그 옆을 여자는 오도카니 지키고 서 있었지. 각오를 하고 왔기 때문에 아주 많이 어색하지는 않았어. 가끔 흘끔거리는 이들은 있었지만 대놓고 여자를 소개해달라는 친척은 없었어. 정말로 남자는 여자를 아무한테도 소개시키지 않았지.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니 친척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안내방송이 들렸어. 남자가 의식적으로 여자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거기까지 억지로 따라왔지만, 남자의 팔을 잡고 사진을 찍으러 나갈 마음은 생기지 않더라. 남자가 사진을 찍으러 무리들 속으로 나간 사이 여자는 혼자 조용히 밖으로 나왔어. 모르는 골목들을 마냥 걸었지. 끝을 자꾸 늦추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생각했지.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문득 옆을 보니 남자가 같이 걷고 있었어. 그 남자는 뛰어나간 여자를 찾아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거야. 남자는 여자가 우는 걸 봤겠지만 눈물을 닦아주지는 않았어. 여자는 이걸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날 오후에, 둘은 아주 천천히, 마치 그 낯선 동네에 집을 얻으려는 나이 든 신혼부부마냥 골목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어.

31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33 바위는 과연 거북이답게 느릿, 느릿, 느릿, 자기의 속도로 온 방 안을 탐험하고 돌아다닌다. 바위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나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마흔번째 생일 아침,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떠올리며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41 전남편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시기는 지나갔다. 그녀는 이제 어떤 사랑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상대에 따라 그 단계들을 유보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138 아무려나 자식에게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룰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힘닿는 대로 지원해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그녀는 믿었다.

139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신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