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경험과 삶

조증 전조증상 의심 2

lunadelanoche 2020. 11. 3. 01:50

11월 3일 새벽 1시 40분. 눈엔 피곤함이 가득차 있는데 도저히 생각을 멈출수가 없다. 자기멋대로 넘쳐흐르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늘어나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았는데, 정신과의사는 이 현상 자체를 조증 증상의 하나로 본다.

보통은 눈을 감고 "이제 생각 그만. 자자."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조급해하지말자" 다시 한번 "미리 걱정하지말자"를 몇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잠들어있기 마련인데, 지금은 '생각 그만'이란 말이 참 무색하게 생각들이 넘쳐 흐르고 있다. 조울증 치료 전에는 이렇게 끌 수 없는 생각에 잠이 안 와서 불안해 했는데, 지금은 잠을 잘 못 자더라도 낮잠을 잘 수도 있고, 어쨌거나 내 몸이 알아서 나중에 보충을 한다는걸 몸소 느끼고 나니 불안이 줄었다. 다만 피곤하고 이 많은 생각들을 어디다 적지 않으면 뭔가 힘들어지는데, 이걸 이렇게 쓴다고 눈이 또 뻑뻑해진다. 자기 전에 먹는 약은 이미 한참 전에 먹었는데... 의사가 이번에 많이 좋아졌지만 조증 증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은 이번 달을 넘기고서 약을 조절하자고 했다.

오늘 생각 보따리는 주로 과거 회상이다. 해외가 배경이 많이 나오는데 순간 순간 말 소리가 들릴 듯 아주 세세하게 장면이 흘러가는 느낌이다. 필름을 감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또 다시 바뀐다.

# 발파라이소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부침개를 해줬다.
# 페루의 끝 아마존 시작인 도시 이키토스에서 배를 타기 위해 아주 작은 관광문의소에 물어보고 스피드보트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나는 아는 언니가 이미 경험해 본 배를 타기 위해 (더 싸고 해먹만 들고 탄다는 것 자체에 매력을 느껴) 헤매다가 배에 도착. 다음 날 빈대가 잔뜩 붙어있던 호스텔에서 나와 배 입구에서 표를 흥정해서 삼.
# 그 다음 장면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마존의 밤. 해먹을 걸어놓고 자던 사람들이 전부 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나와 동생만 남았다. 해먹에 싸여 잘도 잤다.
# whataburger에서 술에 취했는데도 운전해서 드라이브스루로 직행. 치즈 녹인 샌드위치를 밤 열두시 넘어 사 먹는 호수에의 모습.
# 쿠스코에서 버스를 타기 전, 그 근방에 길거리음식으로 세비체가 있었는데, 싱싱한 생선살에 양파와 레몬즙이 잔뜩 버무러져 상콤한데 바삭바삭한 옥수수 알맹이까지! 잊을 수 없는 맛이다.
#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한 첫 날, 호스텔을 찾기 위해 헤맸던 밤이 떠오른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우리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와글와글하고 울퉁불퉁한 광장을 지나 한참을 헤맸다.
# 발파라이소에서 나를 뻗게 만든 terremoto!
# 산티아고에서 헤매던 나의 모습, 잔디밭, 비둘기들, 장엄한 대학 건물들, 세모난 넓은 교차로 그 사이사이 좁은 황단보도가 있다. 신호가 없어 사람들이 건너면 그게 빨간불이 되는 그런 횡단보도다.
# 엘 트리아논 동네에서 아침 6시쯤 나오면 바로 집 앞 화단이 가운데에 있고 그 밑 파라솔 하나에 작은 카트 안엔 정성스럽게 잘라진 열대과일 컵이 있다. 망고, 파파야, 파인애플, 가끔 수박정도. 진짜 싱싱하고 맛있고 싸고 달다.
# 아마존 배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아이들 - 아메리카, 삐에로, 마리아 (¡mirame!)
# 칠레 카우치서핑으로 잠을 재워준 친구가 데리고 간 누구네 집 할머니가 나를 불렀을 때 내가 시 세뇨라 해가지고 여기 칠레에서는 그렇게 대답 안 해도 된다고 했었을 때. 약간 민망했던 기억 - "너 알파벳 알아?" 라고 물어봐놓고 대답하려고 하던 참에 파티에서 나온 부스러기들을 내 입에다 다 갖다 넣으려고 장난친 쌍둥이 중 문신 많은 여자애때문에 속상해졌던 날.
# 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집에 초대에서 갔는데 먹으라고 준 파스타는 참치와 케첩에 버무려져 있었고 딸아이는 꼬질꼬질한 인형을 들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곧 아줌마는 하나님의 교회 달력을 내게 보여줬다.
# 외국인등록증 만들러 하루 빼고 migración으로. 사진도 찍고, 신기하게 커튼으로 옷을 만든 것 같은 것들을 입은 아이들과 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