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체 왜 느닷없이 이런 병이 찾아왔을까? 다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 그 스트레스는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집착과 욕심 때문이라고? 그런데 왜 하필 그 병이야? 이렇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문득 병이 재미있어졌다. 탐정소설을 읽는 듯,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 그리고 차츰 깨닫게 되었다. 병은 저 먼곳에서 우연히, 실수로 들이닥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한 메시지를 들고 찾아오는 전령사라는 것을. 하지만 이제껏 나는 그 봉인조차 뜯어 보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는 것을.
살 만하다,는 게 늘 문제다. 계급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웬만큼 살 만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게 볼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 된다.

19 먼저, 왜 몸통만 있는 것일까? 생명의 핵심은 얼굴과 오장육부에 있기 때문에 사지말단은 굳이 그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리라.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흐름
그에 반해 인체의 모든 것을 세세히 그려야 직성이 훌리는 서구식 해부도는 그러한 비율을 갖춘 신체만이 정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셈이다.
단전호흡의 기본자세 "진실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머리를 살짝 숙여 아래를 보되, 눈은 콧등을 보고 코는 배꼽 언저리를 대하게 되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갈 수 밖에 없다."
21 요컨대, 이 그림은 서양의 해부도와는 달리, 살아 숨쉬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22 이 그림을 포함하여 동의보감에 수록된 장부의 형상은 이미 전통적인 의서와 양생서에 다 등장했던 것들이다. 허준의 독창성은 이 그림을 서두에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저서가 다른 의서들과는 달리 질병과 치료가 아니라 생명의 활동을 위주로 한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는 데 있다. 생명활동이란 몸 안과 밖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을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고, 하늘에 팔풍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이 있다. 하늘에 구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구규가 있고, 하늘에 이십사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5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회로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와 오상을 바탕으로 잠시 형을 빚어 놓은 것이다."
29 선악 이분법이라는 배치를 설정해야만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다고 보는 프리즘. 하지만 이런 프리즘은 동양사상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 유치하다. 물론 도를 터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무수한 적 혹은 라이벌들을 만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조차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신의 안과 밖,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싸움에서 이분법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오히려 궁극적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들을 '도반'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31 정, 기, 신의 접속과 변이, 경락의 배치 등을 파악하려면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몸이어야지 죽은 시체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한의학에선 질병의 원인을 정기신의 균형이 무너진 데서 찾는다. 따라서 치유는 수술을 통해 특정부위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기를 되살려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해부학 자체가 의학의 진보를 말해 주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해부학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몸을 보는 방식이다.
"고대 중국에서 해부의 무시는 시각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비범한 신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의 의자들은 그리스의 해부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세밀하게 관찰했다. 다만 그들은 다소 다르게 보았을 뿐이다."
40 하지만 인생이란 자기의 의도보다는 주변의 인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은가.
41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던가. 유배기간은 정확히 1년 8개월.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이때 한 작업은 전체 분량의 반에 해당한다. 유배지는 그에게 집필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다. 대반전! 만약 이 작업이 없었다면 유배 생활은 얼마나 억울하고 쓸쓸했으랴. 허준으로 인해 동의보감이라는 비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동의보감은 무엇보다 그 편찬자인 허준의 생을 구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다. 흔히 생각하듯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있었기에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허준과 동의보감이 바로 그런 관계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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