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구호 옮김)

lunadelanoche 2020. 12. 1. 09:08

39 상복 입은 여자 하나가 시든 꽃다발을 신문지에 싸 들고 있는 열두어 짜리 소녀를 대동한 채 황량한 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모녀는 자신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무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검은 양산으로 작열하는 뙤약볕을 가리고 있었다. 죽은 도둑의 어머니와 여동생으로, 무덤에 꽃을 가져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은 마을 사람 모두가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모녀를 바라보는, 하나의 동일한 꿈의 형태로 그 후 여러 해 동안 나를 쫓아다녔는데, 어느 단편에 그 이미지를 풀어 냄으로써 결국 떨쳐 버릴 수 있었다.

49 "문제는, 우리가 얘를 가르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는데, 법학 공부를 포기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의사는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충만한 재능에 대한 훌륭한 증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즉, 그런 재능만이 사랑의 힘에 비견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예술적 재능은 모든 재능들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인 바, 인간은 그 재능 덕에 무엇인가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내부에 지니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걸 거부하려고 하는 건 건강에 가장 해롭죠." 이렇게 말한 의사는 결연한 프리메이슨 단원처럼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무리를 지었다. "그건 성직자의 소명과 같은 거예요."
내가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 명쾌한 방식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이내 멍해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한참 동안 말 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팔자 탓으로 돌려 버린 것으로 보아 어머니도 그 말에 동의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59 외조부모에게 아라까따까로 이주하는 것은 망각을 향한 여행이었다.

61 어른들이 내 앞에서 그 사건에 관해 언급할 때는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아리송하게 말했고, 어른들 각자가 나를 사이에 둔 채 사건의 단편들을 자기 방식대로 배치했기 때문에, 나는 그 퍼즐을 결코 완벽하게 맞출 수 없었다.

68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쇄도하는 가운데, 이탈리아, 카나리아 제도, 시리아 사람들(우리는 이들을 터키 사람이라 불렀다.)이 자유를 찾아, 각자의 고향에서 상실하고만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쁘로빈시아의 경계선을 넘었다. 각양각색의 외모와 조건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일부는 이슬라 데 디아블로(프랑스 형무소로 사용되던 기아나의 섬)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는데 대다수는 잡범이라기보다는 사상범이었다. 그중 하나가 르네 벨브누와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형을 선고받은 프랑스 출신 기자로, 바나나 재배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와서는 대단한 책 한 권을 써서 형무소에서 겪었던 무시무시한 일들을 폭로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모든 것들 덕분에 아라까따까는 처음부터 국경 없든 땅이 되었다.

79 어떤 경우든 선조들이 저지른 도덕적 죄들은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가족의 독특한 이름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우선 외가에는 뜨랑낄리나, 웨네프리다, 프란시스까 시모도세아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친할머니는 아르헤미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고, 친할머니 부모님의 이름에 로사나와 아미나답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들의 존재 방식과 일치되는 이름 하나를 갖게 될 때까지는 자기 발로 직접 걸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내게 생기게 된 것 같다.

97 내가 접한 상이한 이야기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았고, 또 내 기억을 그릇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 왔다. (...)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들은 선명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제복, 헬멧 그리고 장난감 총은 공존했으나 그때는 파업 사태가 일어난 지 2년 후였고, 까따까에는 이미 전투병과 군대가 없을 때였다. 내가 그와 유사한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자궁 속 기억들을 여전히 갖고 있으며 계시적인 꿈들을 꾼다는 악명이 자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내 가족의 환경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의 세상 상태였는데, 그 환경을 떠올릴 때마다 한 거대한 집의 고독 속에 슬픔, 동경, 불안이 팽배해 있었다는 생각만 날 뿐이다. 그 당시 기억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밤 되풀이되는 악몽으로 변했고, 나는 성자상들이 안치된 방에서 잘 때와 같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썰렁한 어느 학교 기숙학생이던 사춘기 시절에는 한밤중에 울면서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내가 이렇듯 작가로서 일말의 후회도 없이 늙을 필요가 있었던 이유는, 까따까의 외갓집에서 외조부모가 겪은 불행은 그들이 항상 자신들의 향수 속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이 그 향수를 떨쳐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이 함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실제 까따까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에는 다른 곳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우리가 지금도 달리 부를 방도가 없어 '쁘로빈시아'라 부르고 있는 빠디야 지방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창문 밖 길 건너편으로 메다르도 빠체코가 누워 있는 서글픈 공동묘지가 있는 바랑까스의 집을 의례적으로 모방한 집을 까따까에 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까따까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곳 삶에 만족했으나, 삶은 자신들이 태어났던 땅에 대한 의무감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호, 믿음, 선입견 안에서 버텼고,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이면 무엇이든지 단단한 결속을 과시하며 거부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쁘로빈시아에서 온 사람들하고만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그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지난 세기 자신들의 조부모가 에스파냐에서 가져와 베네수엘라를 통하면서 우리의 언어에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스며들었던, 카리브의 방언들, 아프리카 노예들의 언어, 그리고 구아히라 원주민 언어 쪼가리들에 의해 새 생명이 부여된 언어였다.

99 바나나 회사 매점에서는 박엽지에 싸인 캘리포니아산 사과, 얼음 속에서 꽁꽁 언 도미, 갈리시아산 햄, 그리스산 올리브 열매 등을 염가로 판매했다. 하지만 외갓집에서는 그리움이라는 육수 속에서 맛이 들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 수프에 넣을 말랑가는 리오아차산이어야 했고, 아침에 먹는 아레빠는 폰세까에서 만든 것이어야 했고, 염소들은 라 구아히라의 소금을 먹고 자란 것이어야 했으며, 거북과 바닷가재들은 디부야에서 산 채로 들여와야 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기차를 타고 찾아왔던 손님 대부분은 쁘로빈시아에서 온 사람들이거나 쁘로빈시아에 사는 누군가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100 그처럼 항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정신은 지리적인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콜롬비아 카리브 지역에 위치한 시에라 네바다 데 산따마르따와 뻬리하 산 사이 협곡에 위치한 쁘로빈시아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로, 밀도 있고 유서 깊은 문화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콜롬비아의 다른 지역과 의사소통을 하기보다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직접 하는 것이 더 쉬웠다. 자메이카나 쿠라사오 같은 지역과 교역이 용이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일상적인 삶은 안티야스 제도권과 더 동일했고, 사회적 계급과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문호가 개방되어 있는 국경선을 통해 베네수엘라의 일상적인 삶과 거의 혼동될 정도였다. 미적지근하고 의뭉스러운 사람들이 사는 내륙 지역(보고타 등지), 즉 고도가 2,500미터 달하는 지역, 장작을 연료로 운행하는 증기선을 타고 마그달레나 강을 8일 동안 항해해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에서 획책된 법률들, 세금들, 군인들, 좋지 못한 소식들 같은 권력의 녹은 이 지방에 거의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118 그처럼 복음주의적인 여자 부대 속에서 외할아버지는 나의 완전한 보호막이었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만 불안감이 사라졌고,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 현실 삶에 제대로 정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이한 점은, 당시 내가 외할아버지처럼 현실주의자, 용감한 사람, 확실한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외할머니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지속적인 유혹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24 어느날 아침 마르곳과 내가 정원에서 놀고 있을 때, 매일 오전 11시가 되면 항상 그렇듯 기적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때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몇 개월 전 내가 심한 구토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대황달인 물을 내게 준 바나나 농장의 그 의사가 기차에 타고 있다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 의사가 온다고 소리를 지르며 온 집 안을 뛰어다녔으나 그 누구도 내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하지만 내 여동생 마르곳만은 예외였다. 마르곳은 의사가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갈 때까지 나와 함께 숨어 있었다. "저런 저런! 이런 애들 때문에 전보가 필요 없다니까." 당신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우리를 발견한 외할머니가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혼자 있을 때, 특히 어둠 속에 있게 될 때 느끼는 두려움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밤에는 외할머니의 환상들과 불길한 예감들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곤 했다. (...) 가끔 잠이 들지 않는 불면의 밤이 찾아들면 매일 밤 죽음을 체험하는 어느 행복한 세계에 위치한 그 신화적인 집이 받고 있던 저주를 나 또한 받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125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상야릇한 집은 그 어떤 가정환경보다 내 직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나를 키워 준 외갓집에서 살았던 수많은 여자들의 성격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외할아버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새들의 비행 방법과 오후에 치는 천둥소리들에 관해 교육적으로 설명하면서 어른들의 서글픈 세계에 관해 내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도록 나를 북돋아 주었다. (...) 언젠가 나는 외할아버지가 당신 손자는 화가가 될 거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으나, 화가란 대문에 색칠을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가 되는 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네 살 때 나를 본 사람들은 창백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고들 말한다. 당시 나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할 때만 입을 열었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일상적인 삶에서 나오는 단순한 사거들이었다. 어른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환상적인 요소들을 덧붙여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가장 좋은 출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내 앞에서 나눈 대화들이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암호 같은 것을 섞어 가며 내 앞에서 나눈 대화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는 그 대화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하나하나 분해해 보고, 대화들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이야기들을 뒤집어 보았다. 내가 그 이야기들을 내 앞에서 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주면, 그들은 내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와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바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가끔씩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난감해진 나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130 아버지는 루이스 엔리께의 머리채를 붙잡아 극장에서 끌어냈다. 집에서 그에게 가해졌던 가죽 채찍질은 가족사에 전설적인 징벌로 남았다. 내 동생이 보인 그런 독립적인 행위에 관해 내가 느낀 공포와 감탄은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살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모든 것을 이기고 갈수록 더 영웅적으로 살아남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반역은 아버지가 가끔씩 출타 중일 때는 표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늘날 내 관심을 끈다. 

131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는 그 긴 산보들을 통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시계(視界)에서 자기 것을 보았고, 나는 내 눈높이에서 내 것을 보았다. 외할아버지는 집 발코니에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했고, 나는 길거리 노점상들이 진열해 놓은 장난감들을 갖고 싶어했다. 

138 그제야 비로소 나는 벨기에 출신 노인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을 각색한 레비스 마일스톤 감독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보고난 뒤, 자신의 개와 함께 청산칼리를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벨기에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체스를 두지 않겠네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외할아버지는 마치 독특한 생각이나 되는 것처럼 가족에게 그 말을 전했다. 집안 여자들이 어찌나 열을 내며 그 얘기를 했던지, 얼마 동안 나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그 얘기를 하거나 나더라 그 얘기를 되풀이하라 시킬까봐 두려워 손님들을 피해 다녔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 작가로서 나에게 아주 유용했음에 틀림없는 어른들의 특성에 관해 알게 되었다. 어른들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항목들을 덧붙여 얘기함으로써 각각의 얘기는 결국 원래 얘기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자신들의 부모에 의해 천재로 인정받아 손님이 찾아오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심지어는 어른들을 웃기려고 거짓말까지 꾸며대는 아이들에게 그때부터 내가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문장 하나가 내가 문학적으로 이룬 첫 번째 성취였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143 향수 어린 과거를 회상하는 내 후각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미각에 관한 한, 술들이 창문 맛이고, 묵은 빵들이 트렁크 맛이며, 시럽이 가톨릭 미사 맛이라고 느낀 적이 있을 정도로 미각을 단련시켰다. 이처럼 주관적인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이론상 어려운 일이나 그런 쾌락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즉시 이해할 것이다. 

151 첫 인사를 나눌 때부터 말을 내리다가도, 부부처럼 서로 깊은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만 말을 올리는 콜롬비아의 특이한 관습 때문에 우리는 서로 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역자: 에스파냐어의 2인칭 대명사는 '뚜'와 '우스뗏'인데, 말을 내리는 경우 뚜를 사용하고, 말을 올리는 경우, 우스뗏을 사용한다. 여기에는 친밀도, 지역, 계층, 관습 등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요인들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에스파냐어에 존재하는 이런 차이는 우리말의 경우와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알폰소가 가브리엘보다 열 살이나 많고 아주 친숙한 사이기 때문에 '자네'라고 번역해야 마땅하나, 편의상 '당신'이라 번역했다. 

157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잊혀진 쁘로빈시아의 후미진 구석들에 숨어 있는 문학적 가치들을 발견해 대중 앞에 펼쳐 놓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했다. 

163 "당신들이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것만큼만 씹을 해 줘도 우리 아가씨들은 금을 뒤집어쓰게 될 거요!"

174 "정황상 그렇긴 하겠지만, 아주 설익은 원고처럼 보이는군." 그가 아주 담담하게 내게 말했다. "하지만 잘 썼어."
 시제에 관해 몇 가지 주변적인 코멘트를 했다. 그것은 나를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덧붙였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등장인물들은 단지 사건을 회상하기 위해서만 사건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자네가 알아야 해. 따라서 자네는 두가지 시제와 싸워야 할 것이네."
 그리고 내가 경험이 일천하고 미숙하기 때문에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기술적인 문제 몇 가지를 집약한 후, 초고에서 결정해 놓은 소설의 무대가 되는 도시 이름을 바랑끼야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의 이름이 지닌 한계성 때문에 독자들의 상상 공간을 너무 협소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의 그 놀리는 듯한 어조로 결론을 지었다. 
 "그냥 그렇게 촌스럽게 내버려 두고 하늘이 도와주길 기다리든지. 어찌 되었든, 소포클레스의 아테네는 안티고네의 아테네와는 결코 같지 않았네."
 하지만 내가 그 뒤로 항상 염두에 두고 따랐던 문장은 그날 오후 돈 라몬이 나와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다. 
 "자네의 겸양을 고맙게 생각하는 의미에서 내 자네에게 충고 한 마디 하겠네. 현재 쓰고 있는 초고는 절대 남에게 보여 주지 말게."

181 나는 겁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까따까에 가고, 돈 라몬 비녜스와 역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바랑끼야 그룹 멤버들과 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 내가 평생 지니게 될 새로운 원기를 불어 넣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타자기로 글을 쓰지 않고서는 단 한 푼도 벌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쥐꼬리만 한 혜택을 받으면서 책 네 권을 출간한 이후, 계속해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써서 살아가도록 허용해 주었던 첫 번째 정신 인세들이 내 나이 마흔 몇에서야 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들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 이전의 내 삶은, 나를 작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됐든 다른 직업인으로 변모시키려는 무수한 유혹들을 우롱하기 위한 음모들, 속임수들, 망상들이 서로 뒤엉킴으로써 항상 심하게 요동쳤다. 

183 그러던 어느 날, 티 없이 깨끗한 침대 시트 여러 장을 들고 방문턱에 앉아 자기 몸에 맞는 수의를 짓기 시작했다. 어찌나 정성 들여 예쁘게 만들었던지, 죽음은 수의 짓는 일을 다 끝마칠 때까지 2주 동안이나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수의가 완성되던 날 밤, 병이 나지도 않고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그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어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뒤에야 비로소 식구들은 전날 밤 그녀가 자기 사망 증명서를 작성해 놓았으며 장례식까지 준비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역시 남자를 모르고 지냈던 엘비라 까리요는 집의 끝없는 고독 속에 홀로 남았다. 자정 무렵이면 옆 침실들에서 항상 들려오는 귀신들의 기침 소리가 그녀를 깨웠으나 초자연적인 삶의 고통을 공유하는 데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그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내 뇌리에는 시에나가의 배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아버지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려, 마부들이 산초 빤사에게 그러했듯이, 망토에 둘둘 말아 뱃전 밖으로 내던지려 애쓰던 장면들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 당시 나는 심각한 경우에도 농담하기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농담을 한 건지, 아니면 하찮은 경우에도 심각하게 말하는 걸 즐겨하는 습관에 따라 진지하게 말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231 내 마음속에는 사실, 평소에도 곧잘 버럭버럭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자식들 각자의 교육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화를 버럭 내며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항상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아버지 자신도 가난이라는 강력한 세력 때문에 독학을 했고, 할아버지는 가족의 순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가정에서 교육할 것을 선포했던 돈 페르난도 7세의 강철 같은 도덕심에 고무되어 있었다. 학교가 감옥처럼 무서웠고 규칙적으로 종을 울리는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것은 열세살 때부터는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가족의 명령과 자식 수를 늘리는 부모의 열정으로부터, 위태위태한 세월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책을 읽을 만큼 빛이 비치는 곳에서, 숨쉴 시간도 아까워하며 독서를 하는 자유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261 나와 함께 선실을 사용하게 된 여행객은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고 온몸에 털 하나 나지 않은 천사 같은 사내였다. 그는 '백정 잭'이라는 별명을 자기 것으로 삼아 사용하던, 소아시아 서커스단 소속 칼잡이들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언뜻 보기에 그는 내가 잠자는 사이 내 목을 조를 것 같았으나, 며칠이 지나자 그가 보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는 마음이 몸 속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넓은 아기 거인이었다.

266 그가 지닌 유일한 문제는 첫째 날 식당에서 드러났다. 매끼 4인분을 먹지 않으면 여행을 견디지 못한다고 식당 종업원들에게 항의했다. 식당 지배인이 추가 식비를 더 내면 특별 할인 가격으로 요구를 들어주겠노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상 바다를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굶어 죽지 않을 인간의 권리를 존중해 주었다고 항변했다. 그 문제는 선장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선장은 특유의 콜롬비아식 결정을 내렸다. 2인분을 제공하라는 정식 조치를 취하면서도, 식당 종업원들에게는 모른 체하고 2인분을 덤으로 갖다 주라는 정실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273 16세기 초부터 끊임없이 보슬비가 내리던 보고타는 당시 생경하고 음산한 도시였다. 거리에는,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차림새처럼, 검은 모직 옷을 입고 중산모를 쓴 채 바쁘게 움직이는 남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반면에 눈요기가 될 만한 여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사제복 입은 사제들과 군복 입은 군인들처럼 상가 밀집 지역의 음침한 카페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전차와 공중변소에는 슬픈 표어가 붙어 있었다. "신이 두렵지 않더라도 매독은 두려워하라."
 맥주를 실은 마차를 끄는 거대한 말들, 전차들이 길모퉁이를 돌아 가는 동안 전선에서 내뿜어지는 불꽃들, 그리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걸어서 운구하는 장례 행렬에 길을 양보하기 위해 서 있던 차들이 인상적이었다. 호화 마차들, 벨벳으로 몸을 치장하고 커다란 검은 깃털로 만든 투구를 쓴 말들, 그리고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듯 행동하던 좋은 가문들의 주검들로 이루어진 장례 행렬이 그중 가장 슬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