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lunadelanoche 2020. 12. 15. 16:18

81 우리가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방이 이미 고유한 배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며, 나 역시 고유한 배역을 맡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역할극의 무대다, 세상은. 

98 나는 114에 전화를 걸어 바뀐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132 형의 폐쇄적인 성격(그런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형의 경우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사고가 있기 전에 그는 오히려 적극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편에 속했다)을 감안할 때 어딘지도 모르는 땅으로 영문도 알지 못하는 여행을 감행한다는 건 쉬운 문제일 수 없었다. 

145 어머니의 성대에 가시처럼 걸린 말들이 밖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라면 몰라도 어머니에게 주어진, 어떤 뜻으로는 그녀 스스로 받아든 잔을 물리치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성대에 걸린 가시의 실체가 궁금하다는 건 또다른 진실이었다. 그러나 물론 억지로 빼낼 수 있는 가시는 아니었다. 

146 그것은 그녀의 말이 자신의 공개되지 않은 삶의 일부, 혹은 전부를 드러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부가 전부라는 격언은 이 경우에 맞춤하게 들어맞는다. 공개되지 않았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부를 공개하는 것과 같다. 공개되지 않은 일부는 공개된 전부보다 항상 크다. 

148 세상의 크기는 세상을 인식하는 사람의 인식의 크기를 넘지 못하는 법이니까. 

158 그런데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고, 그래서 아무도 몰래 집을 짓게 했다고, 그리하여 이곳은 자기만의 완벽한 공간이 되었다고, 가끔씩 어딘가로 실종되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고, 그럴때면 며칠씩 이곳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지내다가 올라가곤 한다고, 세상이 여기까지 자기를 쫓아오지는 않는다고, '없는' 곳이라는 말은 그런 뜻으로 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159 몸이 말했다. 몸이 가장 정직하고 가장 확실하게 말했다. 몸보다 정직한 말은 없었다. 몸보다 확실한 말도 없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안을 때 그녀는 아무런 이물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자기 몸처럼 자연스러웠다. 두 개의 몸은 서로를 통해 완벽해졌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랬지. 사랑은 두 개의 몸이 최초의 하나의 몸을 찾으려는 욕망이고 추구라고." 그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꽉 끌어안은 채 말했다. "플라톤이 향연에 썼지요." 그녀가 그의 말을 받았다. "처음에 사람은 얼굴이 둘이고 손과 발이 넷이고 눈이 넷이고 생식기도 둘이었지. 그런데 사람들이 신들에게 도전을 하니까 궁리 끝에 제우스가 사람들의 몸을 둘로 쪼갰다지."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해 사랑을 하게 되는 거구요. 원래의 몸, 원래의 정신을 찾으려고, 원래대로 하나가 되려고..."

161 스물한 살의 겨울, 그녀에게는 시간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지 않았고 시간을 구분하는 일도 불필요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는지 알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회상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존재는 상황을 초월한다. 존재를 규정하는 씨줄이 지워진 때문이다. 씨줄과의 연합 없이 날줄만으로 존재의 좌표가 그려질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의 말대로 그곳은 현실의 어딘가에 '있는' 곳이 아니었고, 지상이 아니었다. 

233 그 순간 나는 단지 듣기 위해 존재했다.

250 형이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는 것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나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의 자리 찾기를 포기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소망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자리 찾기를 포기하고 만 자신을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초월의 정신이거나 무감각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존재의 변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지금의 존재를 버리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변신에 대한 꿈은 얼마나 크고 절망적인 욕망인가. 존재를 건너뛰려는 욕망만큼 큰 욕망이 어디있는가. 욕망을 지우려는 욕망만큼 절망적인 욕망이 어디 있는가. 

267 미각은 다른 감각을 위해 자리를 내주었다. 나에게 그것은 기대감이었고 어머니에게 그것은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