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에리직톤의 초상 / 이승우

lunadelanoche 2021. 1. 26. 09:32

45 토요일 오후는 분주함을 가장할 만한 일거리가 없었다. 나는 예상되는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피해 일찍 신문사를 나섰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는 주말 기분에 들떠 쏟아져 나온 인파에 밀리며 이리저리로 무작정 쏘다녔고, 그러다가 다리가 묵직한 통증을 호소해올 무렵쯤 하여, 눈에 띄는 대로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방 귀퉁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서양 노래의 단조로운 리듬에 귀를 개방하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이곳저곳에서 엄습해왔다. 수첩을 꺼내 들고 전화로 불러낼 만한 이름이 있나 찾아보려다 곧 그만두고 말았다. 무의미한 잡담을 견딘다는 건 이보다 더욱 외로운 일인지 몰라.

46 빌어먹을! 부질없는 잡념 끝에 욕설을 만들어 붙이고 갑자기 행선지가 생각났다는 듯 황급히 일어서 버렸다. 자리가 없다고 나는 중얼거렸다. 혼자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사람이 편안하게 몸을 의지할 공간이 서울엔 없다. 그때 그럴듯한 생각 하나가 퍼뜩 날아올랐다. 정지된 공간이 짝을 이룬 각각의 소집단에만 허용된 것이라면, 움직이는 공간은 개인들을 위해 제공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엉뚱한 착상이 그것이었다.

51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궁극에 있어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는 법이다.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우리들 의식의 교묘한 반영이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신적인 능력의 잠재적 발효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해야한다. 욕망이 손을 뻗는 곳에 숙주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우연은 결국 필연이며 우리에게 신의 형상이 눈곱만큼이나마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1 단조로운 기계음을 내면서 언제나처럼 시간은 팔뚝 위에 앉아 게으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