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상사 (상)
27 세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줄 공간은 - 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 어디에도 없다. 네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그러나 네가 침묵을 구할 때 거기에는 끊임없는 예언의 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가 이따금 네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비밀 스위치 같은 것을 누른다.
네 마음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범람한 큰 강물과 비슷하다. 지상의 표지판이나 방향판 같은 건 하나도 남김없이 그 탁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미 어딘가 어두운 장소로 옮겨져 있다. 그리고 비는 강 위로 계속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그런 장마 광경을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꼭 그대로다, 그게 바로 내 마음과 같은 거야, 하고.
78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는 도서관 열람실에는 나밖에 없다. 그 아담한 방을 나는 완전히 독차지할 수 있다. 잡지의 사진에서 본 그대로다. 천장이 높고 넓고 여유가 있으며, 게다가 온화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활짝 열어젖힌 창으로 이따금 산들바람이 들어온다. 흰 커튼이 소리도 없이 흔들린다. 바람에서는 역시 바다 냄새가 난다. 소파는 나무랄 데가 없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어, 마치 누군가 친한 사람 집에 놀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 이 작은 방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장소임을 깨닫는다. 나는 바로 이런, 세계의 음푹 파인 데와 같은 은밀한 장소를 찾고 있던 것이다.
90 나는 자유다, 라고 생각한다. 눈을 감고, 내가 자유다, 라는 것에 대해 한동안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외톨이라는 사실뿐이다. 혼자 모르는 고장에 와 있다. 자석도 지도도 잃어버린 고독한 탐험가처럼. 자유란 이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조차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110 로커룸에서 운동용 반바지와 가벼운 티셔츠로 갈아입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근육을 풀고 있는 동안에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간다. 나는 나라고 하는 틀 속에 들어 있다. 나라는 존재의 윤곽이 찰카닥하는 작은 소리를 내면서 딱 하나로 겹쳐지며 자물쇠가 채워진다. 이제 됐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 있다.
138 덤불 속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여 손이 미치는 곳을 대충 더듬어 본다. 그러나 내 손에 닿는 것은 학대받은 동물의 마음처럼 단단하게 비틀어진 관목 가지밖에 없다.
190 모든 일들이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 큰 전쟁에 관한 일도, 돌이킬 수 없는 생사 문제도, 모든 일들이 먼 과거의 일이 되어갑니다. 나날의 삶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많은 중요한 일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오랜 별처럼 의식 밖으로 사라져갑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일도 너무 많습니다. 새로운 양식,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말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주춧돌처럼 자기 안에 남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결코 마모되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251 누군가 나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그 시선을 따끔따끔하게 피부로 느낀다. 심장이 메마른 소리를 낸다.
260 숲 속은 나무가 지배하는 장소다. 깊은 바다 밑바닥을 심해의 생물들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266 곧이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통나무집의 지붕과 유리창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른다. 나는 즉시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그 빗속으로 뛰어든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멋진 기분이다. 나는 큰 소리로 의미도 없는 말을 외쳐본다. 크고 단단한 빗방울이 작은 돌멩이처럼 온몸을 때린다. 그 온몸에 따끔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종교적인 의식의 일부 같다. 그것은 내 뺨을 때리고, 눈꺼풀을 때리고, 가슴을 때리고, 배를 때리고, 페니스를 때리고, 고환을 때리고, 등을 때리고, 다리를 때리고, 엉덩이를 때린다.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아픔에는 분명히 아픔보다는 친밀한 정감이 깃들어 있다. 이 세계에서 내가 한없이 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351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411 나카타 상이 쉰두 살 되던 해에 가구 회사의 사장이 사망하고, 목공소도 즉각 폐쇄되었다. 어두운 색조의 민예 가구는 전만큼 팔리지 않았다. 직공도 노령화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전통적인 수작업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전에는 들판 한가운데 있던 목공소 주위가 점점 주택지가 되어, 작업할 때의 소음이나 톱밥을 태우는 연기에 대한 항의가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시내에서 회계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 아들은 당연히 회사를 계승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부친이 사망하자마자 즉시 목공소를 폐쇄하고 부동산 업자에게 매각했다. 부동산 업자는 공장을 부수고 터를 다듬어서 아파트 업자에게 팔았고, 아파트 업자는 그 자리에 육층짜리 맨션을 건설했다. 맨션은 분양 당일에 전부 팔려나갔다.
그렇게 해서 나카타 상은 직장을 잃었다. 회사에 부채가 남아 있다는 구실로 쥐꼬리만 한 퇴직금이 나왔을 뿐이다.
414 나카타 상은 극히 한정된 어휘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422 늑골의 우리 속에 갇힌 뜨거운 심장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축되고 확대된다. 확대되고 수축된다.
(하)
195 정상이 아닌 일을 정상적으로 생각해 보았자 헛수고라는 걸 말이야.
"현명한 결론이로군그래. '하수가 아무리 오래 생각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겠나'라는 말도 있지."
218 미궁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낸 것은, 지금 알려져 있기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이야. 그들은 동물의 창자를 - 때로는 인간의 창자를 - 꺼내서 그 형태로 운명을 점쳤지. 그리고 그 복잡한 형태를 찬양했어. 그러니까 미궁의 기본 형태는 창자야. 즉 미궁의 원리는 네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건 네 바깥쪽에 있는 미궁의 성격과도 서로 통하고 있어.
네 외부에 있는 것은 네 내부에 있는 것이 투영된 것이고, 네 내부에 있는 것은 네 외부에 있는 것의 투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지. 그래서 넌 종종 네 외부에 있는 미궁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너 자신의 내부에 세팅된 미궁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거지.
232 "나는 자위대에서나 운송 회사에서나 줄곧 차를 운전해 왔으니까 운전에는 비교적 자신이 있어. 그렇지만 핸들을 잡고 있을 때는 항상 어딘가 분명하게 갈 곳이 있었다구. 똑바로 일직선으로 목적지를 향해 갔다 이거지. 그게 습관처럼 되어 있거든.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적당히 가달라'는 식의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니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네."
241 시간이 닻을 잃은 배처럼 정처 없이 넓은 바다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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