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말린체 / 라우라 에스키벨 (조구호 옮김)

lunadelanoche 2021. 4. 14. 22:10

143 호기심이 발동한 소녀가 나비들이 계속 집에 머물면 항상 볼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제왕나비들은 수많은 새들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움직이는 바람을 따라 이동함으로써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새로워지고, 더 강해지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제왕나비들이 이렇듯 매년 여행을 하는 것은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었다. 먹이를 찾아, 겨울의 추위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후를 찾아 이동하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었다. 제왕나비들은 이런 식으로 삶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제왕나비: monarch butterfly, mariposa monarca)

162 말리날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고, 시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이해했다. 그녀는 하늘에 있는 별의 움직임을 통해, 그리고 파종과 추수, 삶과 죽음의 순환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바느질을 하면서도 시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우이필은 투여된 시간에 대한 증거이자, 투여된 시간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에 대한 증거였다.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을 때마다 말리날리는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고, 그 사람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공유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바느질을 할 시간도, 자수를 놓을 시간도 없었다. 에스파냐 사람들 옆에서 살아가는 동안 시간에 관한 말리날리의 관념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제 말리날리는 행군하는 날의 수, 전투하는 날의 수, 통역하는 단어의 양, 꾸며지는 음모와 전략의 양을 통해 시간을 측정했다. 그녀의 시간은 점점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고, 그녀 자신이 어떤 사안의 본질을 차분하게 생각할 만큼 자유로운 순간은 단 한 번도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 그녀의 시간과 코르테스의 시간은 불가피하게 교차되고, 연결되고, 묶였다.

181 말리날리는 당시까지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것을, 마음에 드는 것을 여러 차례 버려야 했었다. 새로운 세상 하나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다시 무에서 출발해야 했었다. 모든 것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테노츠티틀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긴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소란 피우지 않고, 소동을 일으키지 않은 채, 마침내 그런 식으로, 차분하게 뿌리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평화롭게. 사안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00 에스파냐 사람들은 케찰코아틀의 정신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못 했기 때문에 케찰코아틀의 정신을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을 파괴했을 뿐, 그 밖의 것은 그들의 손을 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