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21 장소를 넘나들다 보면, 시간을 넘나드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 같다. 계획에서 추억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또 관찰로 넘어가고.
•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행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보행의 욕구를 만족시키자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움직임으로는 부족하다. 몸 자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 P27 인생을 만드는 것은 공식적 사건들 사이에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고,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계산 불가능한 일들이다. 보행은 지난 200년간 예측 불가능한 일들, 계산 불가능한 일들을 탐구하는 최상의 방법이 되어주었는데, 이제 이 방법이 여러 전선에서 위협받고 있다.
• P35 생각에 충실한 사람들은 대개 떠돌아다닌다. 생각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에 충실한 유형과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터전에 충실한 유형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나 터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반면,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가가기 위해 떠난다고 할까. 사색가가 떠돌아다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생계다. 생각이란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좋아할 수 있는 그 무엇, 이를테면 농작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을 재배하는 사색가는 진리을 찾아다녀야 할 뿐 아니라 먹고살 길을 찾아다녀야 한다. 예로부터 여러 문화권에서는 커뮤니티 간의 분쟁 탓에 자기가 속한 특정 커뮤니티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 P81 남서쪽으로 휘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이어질 샛길을 벗어나 길없는 거대한 사막을 느릿느릿 가로질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구속을 벗어난 느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을 맛보았다. 사막의 시간이었다.
• P83 Travel 어원이 travail 노동, 고통, 출산
• P84 축복이 고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고행이 사람을 축복에 값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명확히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정리가 필요한 문제도 아니다. 순례를 그야말로 영혼의 여행으로 여기는 관행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 금욕과 고행을 영혼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시각 또한 거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
• 116 기독교는 전 세계로 수출된 휴대용 종교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은 그곳의 풍경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앞사람의 해석이다.
• P118 나는 미로의 교훈을 이해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목적지로부터 돌아서야 하는 때가 있다, 때때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가장 멀리 있는 것일 때가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 먼길뿐일 때가 있다는 교훈이었다.
• P119 나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 책을 제일 좋아했다. 현실과 재현의 구분이 그렇게 확실치는 않다는 것, 그 구분이 사라질 때 마법이 시작된다는 것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이 먼길뿐일 때가 있다고 느낀다.
• P120 미로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 사르데냐에는 바위 미로가 있고, 애리조나 남부와 캘리포니아에는 돌사막 미로가 있다. 로마인들의 모자이크 미로도 발견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땅에 돌을 놓아 만든 유명한 미로가 500개가량 있다. 잉글랜드에는 잔디 미로가 있다. 미로는 젊은이들이 에로틱한 놀이를 즐기는 장소였다. 예컨대 야자가 중앙에 가 있으면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달렸다. 미로의 굽이굽이 도는 길은 구애의 복잡함을 상징했다.
• 르네상스 정원의 미로를 후대에 귀족적 형태로 변형한 산울타리 미로가 있다. 미궁maze과 미로labyrinth를 구별하면서 대부분의 정원 미로를 미궁에 넣는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미궁의 목적인 반면에, 미로의 길은 하나뿐에라서, 누구든 계속 걷다 보면 중앙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고, 돌아서서 걷다 보면 들어갔던 곳으로 나올 수 있다.
• P122 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글을 쓰는 일이 걷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상상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혹은 저자라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이다.
•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한 줄로 멀리까지 이어지면서 글이 곧 길이고 독서가 곧 여행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이 돌돌 말려 있는 실타래처럼 글이 빽빽이 차 있는 책을 한 줄로 쭉 풀면, 내가 쓴 책 한 권의 길이는 6킬로미터가 넘는다.
십 년동안 김밥 장사를 하며 만든 김밥을 일렬로 세우면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을거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 P123 우리가 인생 그 자체를 여행으로 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그려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려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공간상에 존재라는 물리적 대상에 비유하게 된다. 그렇게 대상과 물리적, 공간적 관계를 맺게 되면, 대상을 향해 나아가거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공간으로 보게 되면, 인생이라는 시간도 여행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살면서 실제로 여행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같은 것은 상관없다. 보행과 여행은 우리가 하는 생각과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 너무나 중요한 비유로 자리 잡은 탓에 이제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 걷는 사람, 즉 한곳에 머물기보다 혼자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인원이든 시골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내려오는 사뮈엘 베케트의 등장인물이든 인간의 의미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걷는다는 비유가 비유이기를 그칠 때는 우리가 실제로 걸을 때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여행할 때 우리 삶은 실제의 삶이 된다. (실제의 삶- 도착이 가능한 목표 지점, 확인이 가능한 진행 과정, 이해가 가능한 평가 결과가 수반되는 삶) 비유가 행동과 하나가 된다고 할까. 미로를 걸으면서, 순례에 나서면서, 산을 오르면서, 어떤 분명하고 바람직한 목적지를 항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글자 그대로의 길(오감을 통해서 영적 차원에 접근하는 길)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걸어가는 것, 여행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중요한 비유라면, 모든 걷기와 모든 여행을 통해(그중에서도 특히 십자가의 길과 미로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상징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 P126 오늘날의 조각 공원(조각상 하나하나가 개발 작품이고 각각의 작품을 둘러싼 녹지가 모종의 액자가 되는 형태)과는 달리, 전체를 책처럼 읽을 수 있는 공간, 서재 못지않은 지적 공간이었다. 조각상들은 순서에 따라서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걷는 순서가 보는 순서였고, 보는 순서가 해석하는 순서였다. 그런 옛날 조각 정원의 매력 중 하나는 걷기와 읽기, 육체와 정신이 조화롭게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다.
• P196 특별히 보행을 다룬 최초의 수필은 해즐릿이 1821년에 쓴 길을 떠나며이다.
On going a Journey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은 일 가운데 하나는 길을 떠나는 것인데, 나로 말하자면 혼자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걸을 때 혼자인 편이 좋은 이유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내내 다른 사람들을 의해 그 책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고, "나는 내 막연한 상념이 민들레 솜털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지 그 상념이 논쟁의 가시덤불에 엉켜 붙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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