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스크랩

태풍 19호 (서경식 칼럼/한겨레)

lunadelanoche 2020. 9. 9. 13:4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4461.html

 

[서경식 칼럼] 태풍 19호

기상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재해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느끼는 위협은 자연재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야비하고 차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도쿄 상업지�

www.hani.co.kr

 정말 "앓고 있는" 건 누구인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나는 부끄럽다. 지구환경 문제에 이렇다 할 공헌도 할 수 없는 나, 그리고 이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들이 활보하고 다니게 만든 무기력한 나 자신이. 
 태풍 19호와 관련해 두가지 얘기해 두고 싶은 뉴스가 있다. 하나는 태풍이 한창 맹위를 떨치던 지난 12일, 도쿄도 다이토구가 설치한 피난소로 대피하려던 노숙자 2명이 입소를 거부당한 뉴스다. 피난소 입구에서 직원이 이름과 주소를 쓰라고 하자 노숙자 남성은 사실대로 “주소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피난소는 구의 주민만 이용할 수 있으며 주소불명자는 안 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나중에 시민단체 등이 항의했으나, 일반인 중에서는 “세금도 내지 않았는데”라는 소리도 나왔다. 어느 예능인은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평소 지붕 없는 곳에서 살았는데, 재난 때만 지붕 밑으로 가겠다는 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서민의 도덕관을 ‘허울 좋은 겉치레’ ‘위선’이라며 조소하는 나쁜 풍조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누구나 성인이 아닌 이상 좁은 공간에 옷차림도 불결한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내심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본심을 부끄러움도 없이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것, 그렇게 해서 방관자들로부터 갈채를 받고 흡족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그런 본심을 자제하고 그 약자를 불러들여 물 한잔, 컵라면 하나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일까. 이처럼 인륜의 기본이 무너져버린 추한 사회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우울하다.
 또 하나는, 태풍 19호가 지나간 뒤인 14일, 도쿄도 히노시의 다마가와 하천 부지에서 노숙생활자로 보이는 남성의 주검이 발견됐는데, 18일 현재 이번 태풍 재해로 인한 도쿄도 내 유일한 사망자로 보인다는 뉴스였다(<마이니치신문> 10월19일). 피해 통계 수치에는 그냥 1로만 기입될 그 사망자는 호우 때문에 탁류로 변한 강 한가운데의 모래톱에서 지붕도 우산도 없이 상의도 입지 못한 상태로 익사했다.
 나는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생각한다. 그 피난소에서 이름·주소를 쓰라고 요구받은 사람이 외국인이었다면 어떠했을가? 일본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 더듬거리는 일본어, 주소도 불확실한 사람이었다면? 내 우울한 상상은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 때 자경단이 불러 세우고 발음하기 어려운 ‘15엔 50전’이라는 말을 하게 해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경우 학살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의 비극으로 향한다.
 기상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재해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느끼는 위협은 자연재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야비하고 차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도쿄 상업지구에서 수십년간 근면하게 살아가고 있는, 저 사람 좋은 ㄱ씨 일가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걱정은 기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위 기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