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 칼럼] 스페인 독감과 코로나19 팬데믹 사이에서 | 피렌체의 식탁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코로나19) 사태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몇 개월간의 1차 팬데믹 주기가 끝나면 2차 주기가 시작되고 그 위력은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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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이 창궐했을 때도 전 지구적 인구이동이 활발했는데, 먼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다. 스페인 독감은 영국군 부대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고 미국군 부대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는데, 어쨌든 군대조직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좁은 공간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훈련과 규율에 따른 심신의 스트레스가 심하며, 영양 및 위생상태도 좋지 않은 당시 군대조직의 특성은 스페인 독감의 발생 및 확산을 촉진한 온상, 배양장소와 같았다. 1918년 봄부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던 미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수송선을 타고 유럽 전장으로 옮겨갔다. 환기도 잘 안되고 인구밀도도 높은 선내에 바이러스가 퍼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가 아니라 배 안에서 죽었다.
미국 군인들이 옮겨서 유럽과 세계 전체로 퍼져간 당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사태에 ‘스페인 독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스페인이 그때 중립국이었던 사정에서 기인한다. 전쟁 당사자인 다른 열강들은 전쟁 수행을 위한 철저한 정보통제로 인플루엔자 확산과 그로 인한 엄청난 피해들을 숨겼다. 그 참극은 스페인에서만 드러나 보였다. 역병의 이름이 그렇게 해서 붙여졌다.
당시 미군들이 파병된 유럽에는 전쟁 당사자인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인도차이나(프랑스), 인도와 버마(영국) 등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었고, 중국인 일꾼(쿠리, 苦力)들도 많이 유입돼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후지하라 교수는 당시 일본에서도 수백만 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때 일본인 사망자가 25만 명 정도였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당시 일본은 1차 대전에 개입했고,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반(反)혁명군 지원을 위해 러시아에 군대를 보낸 열강들처럼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에도 나섰다.
일본 국내에서는 불어나는 인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쌀 공급 부족으로 ‘쌀 소동’이 일어났다. 그 무렵 조선에선 3·1운동(1919년)이 일어났고, 일제는 자국 내 쌀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20년부터 조선의 쌀 생산·수탈을 늘리기 위한 산미증식계획을 강행했다. ‘당시 759만 명의 조선인구 중에 38%인 288만여 명이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그들 중 14만 명이 숨졌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한다(1918년 조선총독부 통계연감)’는 연구 결과(송홍근)도 있다.
인도가 확산 초기에 서둘러 국경을 봉쇄한 까닭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은 인도(1천만 명 사망)를 비롯해 아시아였다. 이번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인도가 일찌감치 전면적인 국경 폐쇄조치를 취한 것은 그런 끔찍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후지하라 교수도 그렇고 <이코노미스트>를 비롯한 많은 국내외 언론매체들도 지적하듯이, 이런 팬데믹의 최대 희생자는 위생·건강 상태가 좋지 않고 과잉인구와 빈약한 영양, 낙후된 의료환경 속에 놓여 있는 약소국의 약자들이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베트남이 중국 다음으로 급속히 확산되던 한국 사람들의 자국 입국을 막은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 베트남의 결정에 대해 인터넷 매체 등에 험악한 비난을 늘어놓은 일부 누리꾼들은 그런 사정이나 역사를 한 번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반응들 중에는 인종주의적 편견이나 약자에 대한 멸시, 우월감에 젖은 것들도 있다. 그런 류의 인종적 편견이나 우월감, 몰이해, 그리고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감이 바이러스 자체보다 인류에게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후지하라 교수는 지적한다. (...)
마지막으로 후지하라가 제시하는,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침 몇 가지.
하나는, 양치질, 손 씻기, 이 닦기, 세안, 환기, 목욕, 식사, 청소, 수면 등 일상의 청결습관을 지킬 것(그리고 지켜줄 것). 그리고 잘 먹고, 잘 웃고, 잘 자서 면역력을 높일 것. 이 중요한 일들이 일상에서 너무 간과돼 온 것을 반성할 것.
둘은, 조직이든 가정이든 폭력이나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 그것을 피하거나 이의제기를 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 이의제기를 억제하거나 자숙하며 참는 것은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을 더욱 키울 것이다.
셋은, 전쟁이든 올림픽이든 만국박람회든 재해나 감염증 등으로 간단히 중단되거나 연기할 수 없는 행사에 너무 올인 하지 말 것. 그랬다간 세금뿐만 아니라 시간도 큰 손실을 볼 수 있다. 언제든 가볍게 기본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심플한 정신과 운영이 필요하다.
넷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보호하라는 것. 코로나 19가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바로 약자들이다.
다섯은, 위기에 처하더라도 정보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제기를 하게 내버려 두라는 것. 자유로운 정보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상의 유료기사도, 예컨대 코로나19 관련 기사라면, 그런 것들만이라도 무료로 배포해야 하며, 그것은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후지하라는 결론삼아 이렇게 얘기한다.
일본이 팬데믹 이후에도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국가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내버리는 데에 저항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코로나19 확산 시기에) 우한(武漢) 봉쇄의 나날을 일기로 써서 공개한 중국 작가 팡팡(方方)의 얘기를 소개한다. “한 나라가 문명국가냐 아니냐는 기준은 고층빌딩이 많거나, 자동차들이 질주하거나, 무기가 발달했거나, 군대가 강하거나, 과학기술이 발달했거나, 예술이 다채롭거나, 화려한 이벤트를 할 수 있거나, 불꽃놀이가 호화찬란하거나, 돈의 힘으로 세계를 호화롭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온갖 것들을 사들이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기준은 단 하나다. 그것은 약자를 대하는 태도다.”
그리고 이 위기의 시대에야말로 “모두가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아무 생각 없이 함께 돌을 던지는 비겁을 버리라”며, 그것이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판단재료일 것이라고 단언했는데, 이건 아무래도 일본의 답답한 현실을 염두에 두고 한 얘기 같다. 아니, 글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저항하라”라고 외치는 것처럼.
(위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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