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60

캉탕 / 이승우

13 걷고 보고 쓴다. 한중수는 그것 말고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계획을 세울 여유 같은 것이 없었다. 걷고 보고 쓴다는 것을 계획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긴 하다. 하지만 그 계획은 한중수가 세운 것이 아니다. 걷고 보고 쓸 것. 그것은 그를 한번에 두 시간씩 다섯 번 상담한 J의 조언이었다. 15 J는 말했다. "니체는 하루에 여섯 시간씩, 어떨 때는 여덟 시간씩 걸었다고 한다. 지독한 두통을 잊어보려고 그랬다는 거야. 젊을 때부터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렸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두통이 사라졌다고 하지. 언젠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 자기가 쓴 책 속의 거의 모든 생각들이 걷는 중에 떠올랐다고 고백하기도 했어.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다고 말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하지 않아? ..

후기/책 2020.10.19

스토너 /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16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다른 강사들의 얼굴이나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의 얼굴, 그의 건조한 목소리, 베오울프나 초서의 어떤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깎아내리는 말 등은 항상 스토너의 의식의 문턱에 걸려 있었다. 20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22 그때의 시간은 익숙하게 흐르지 않고 발작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후기/책 2020.10.19

돈키호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안영옥 옮김)

나의 행복을 앗아 가는 자 누구냐? 매정함 그리고 나의 비탄을 늘리는 자 누구냐? 질투 그리고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자 누구냐? 부재 그래서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처방이 없노라. 매정함, 질투 그리고 부재가 나의 희망을 죽이기에. 이 고통을 나에게 주는 자 누구냐? 사랑 그리고 나의 영광을 혐오하는 자 누구냐? 운명 그리고 나의 비탄에 동의하는 자 누구냐? 하늘 그래서 나는 이 알지 못할 병으로 죽을까 걱정하노라. 사랑, 운명 그리고 하늘이 나를 해치기에. 나의 운명을 달랠 자 누구냐? 죽음 그리고 사랑의 행복을 갖는 자 누구냐? 변덕 그리고 사랑의 괴로움을 치유하는 자 누구냐? 광기 그래서 열정을 고치려 하는 자는 제정신이 아니노라. 죽음, 변덕 그리고 광기가 치유의 처방이기에.

후기/책 2020.10.19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 바이센테니얼맨

전 항상 논리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의 존재에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더 이상 불멸이 아닙니다. 점점 늙어져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처럼 곧 기능이 정지됩니다. 로봇이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원히 기계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고 싶습니다. 그걸 원하는 이유가 뭐죠? 인정받고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가 누구인가 대해 찬사나 평가가 아니라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명예를 걸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I always try to make sense of things, there must be some reason I am as I am. As you can see, I am no longer immortal. I am growing ..

후기/영화 2020.10.17

진짜 가볍게 재밌는거 보고 싶을 때 / 치킨먹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 / 레온 (2018)

포스터를 보고 어떤 이야기인지 살짝 들었을 땐 재밌을까? 싶었는데 오! 연기력이 장난이 아니다. 강지영씨가 정말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거라면, 그러니까 모국어가 아닌데 일본어로 주연 영화까지 찍은 거라면 진심으로 대단한 일이다. 배우 강지영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나는 이 주제면 무조건 옛날 영화 '핫칙'이 떠올랐었는데 이젠 '레온'이 떠오르겠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9286레온Daum영화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movie.daum.net

후기/영화 2020.10.08

넷플릭스 추천다큐 / 소셜 딜레마 (2020)

SNS에 관한 부정적인 면을 듣고 싶다면 이 다큐를 봐야 한다. 실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 래딧, 트위터 등등 우리가 매일 시도때도없이 보고 있는 이 소셜미디어앱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페이스북은 더이상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구라고 하면 스스로 생각하거나 움직이는게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쓰여야 하는 것인데, 소셜미디어앱은 그렇지 않다. 목적이 있다.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 정보를 보여줘서 뭔가를 클릭하게 하거나 구매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다. 그들의 목표는 한 가지다. 광고 수익을 얻는 것. 그걸 위해 소비자학과, 마케팅, 빅데이터에서 공부라고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생각을 심는다. 좀비가 되어간다. 사람을 user라고 부르는 업계는 두 군데 ..

후기/영화 2020.10.08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로런 엘킨

우리는 개인인가 군중의 일부인가? 우리는 두드러지고 싶은가 눈에 뜨이지 않게 섞이고 싶은가? 어느 쪽이든 뜻대로 하기가 가능하기는 한가? 성별과 무관하게, 우리 각자는 군중 속에서 어떻게 비치기를 바라나? 시선을 끌기를 바라나 시선을 피하기를 바라나? 현저한 존재이기를 바라나 눈에 뜨이지 않고 묻히기를 바라나? 돋보이기를 바라나 무시되기를 바라나? 21 파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되는 때가, 심장이 덜컥 멈춘 것 같은 때가 있다. 나 말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사방이 존재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파리에서 지낸 여섯 달 동안 거리는 집과 목적지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어디든 흥미로워 보이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갔다. 무너져 내리는 벽,..

후기/책 2020.10.06

노멀 피플 / 샐리 루니

21 메리앤은 자신의 진짜 삶이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 그녀를 빼놓고 이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내서 그 일부가 될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학교에 있을 때면 그런 기분을 종종 느끼곤 했지만, 그 진짜 삶이라는 것이 어떤 장면이나 감각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 그 삶이 어떤 것일지 더 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66 그 말은 진실이었을까? 그것을 판단하기에 그는 확신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히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순간, 자신이 가끔 무계획적으로 혹은 까닭도 모른 채,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74 그..

후기/책 2020.10.06

스토너 / 존 윌리엄스 (Stoner by John Williams)

16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Away from the classroom, doing his chores about the farm or blinking against the dim lamplight as he studied in his windowless attic room, Stoner was often aware that the image of this man had risen up before the eye of his mind. 다른 강사들의 얼굴이나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He had difficulty summ..

후기/책 2020.10.06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여기군요. 여기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집에서 가장 멀리까지 나온 게 돼요. 빌보 삼촌은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지. "위험한 일이야, 프로도. 집을 나서는건 말이야. 길에 발을 내디디며 제대로 가지 않으면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디론가 휩쓸려 가버려." This is it. If I take one more step, it will be the farthest away from home I've ever been. Remember what Bilbo used to say, "It's a dangerous business, Frodo going out your door. You step onto the road and if you don't keep your feet, there's no knowing..

후기/영화 2020.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