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44

내 방 여행하는 법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84 동료들의 애통 속에 최후를 맞이한 감수성 여린 한 젊은이의 죽음과 아침 찬 기운을 맞고 꽃받침 위에 져 버린 한 마리 나비의 죽음은 자연의 흐름 앞에선 하나 다를 바 없는 두 개의 사건일 뿐이다. 인간이란 그저 허공에 흩어져 버릴 운명을 지닌 유령 같은 존재며 한 조각 그림자이자 한 줄기 연기다. ... 아니다.내 친구는 무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그 장애가 어떤 것이든 나는 그를 다시 만나리라. 공허한 삼단논법으로 희망의 집을 짓는 게 아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날벌레의 비상을 보고도 나는 확신한다. 전원의 풍경, 대기의 향기, 나를 둘러싼 이름 모를 매혹에 사고는 고양되고, 마침내 거부할 수 없는 영원에 대한 확신이 거침없이 내 영혼 속으로 밀고 들어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후기/책 2020.11.28

교양노트 / 요네하라 마리

48 개성은 만인에게 알기 쉬운 형태로 바로 표면에 드러나는 유형과, 개성임을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유형이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최근의 생물학에서는 같은 종류의 동물 사이에도 꽤 큰 개체 차이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 개미 한 마리를 잡아서 그 특징을 개미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그 개미 한 마리만의 특징이었을 뿐인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53 시간을 헤아리는 방법과 명칭을 정할 때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설득력 있는 유래와 경위, 주장하는 쪽의 지배력과 영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은 한번 정해지면 그것을 수용한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의 것이 되고 만다. 그 근거 자체가 없어졌다고 해도 쉽사리 바꿀 수 없게 된다...

후기/책 2020.11.27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 이승우

32 희귀한 우연에 대한 끈질긴 사색은 운명론으로 유도되기 쉽다. 운명론은 종종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사랑의 중요한 동력인 개인의 욕망과 선택을 가린다. 운명적인 사랑이 운위되는 자리에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문장은 불순하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문장이 올바른 유일한 문장이 된다. 나도 그랬지만, 사랑에 빠져 들어가는 순간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운명론자의 영혼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평가와 판결의 영역에서 제외시킨다. 이제 사랑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찾아온 것이 되고,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면책의 특권을 갖는다. 68 사소한 기억들..

후기/책 2020.11.25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9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뱉는 순간 허공에 흩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장 깊은 안쪽에 가만히 모아두고 싶다. 그것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30 함께 남자 쪽 친척의 결혼식엘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남자가 여자를 그런 자리에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여자는 알고 있었어. 그런 건 꼭 말로 듣지 않아도 알게 되는 법이니까. 평소 같으면 여자는 구태여 따라나서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달랐어. 이상하게도 꼭 한 번은 막무가내로 남자를 따라나서고 싶었던가 봐. 친척들에게 여자가 누구인지 소개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어. 축의금 봉투를 내고 오랜만에 만..

후기/책 2020.11.24

정신과 의사가 붓다에게 배운 트라우마 사용설명서 / 마크 엡스타인 (이성동 옮김)

36 트라우마로 남은 감정의 원인을 밝혀내는 문제는 그 감정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의 문제만큼은 중요하지 않다. 37 붓다는 자신의 트라우마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붓다는 공감이나 적절한 반응 같은 것을 이끌어내서 자신에게 필요한 내면 환경을 스스로 창조했다. 붓다의 성공은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모범이다. 우리가 직면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불편한 감정을 이용하여 우리 마음이 바로 넓은 바다가 되어야 한다. 47 배고프고 무엇이 필요하고 불편한 것을 해소하길 바랄 때, 아기가 격렬하고 무자비하게 자신의 욕구를 부모에게 표현한다는 것을 부모는 잘 안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이런 원초적인 감정에 반응하여, 아기가 이런 상황을 잘 견딜 수 있게, 아주..

후기/책 2020.11.04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탕누어

24 정말로 진실하고 성실한 영혼들은 이러한 분류와 질서의 시스템이 대항할 수 없는 것으로서, 뒤흔들거나 제거한다는 것은 더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마르크스는 최후의 낙관론자였지만 형편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벤야민은 평생 분류되거나 어떤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남들이 주장하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아주 작은 '사적 공간'뿐이었다. 25 위대한 세계 혁명이 이 모양으로 위축되어버린 데 대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벤야민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들의 난처한 처지를 잘 이해할뿐더러 우리 능력의 한계를 동정하고 있으며, 우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추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

후기/책 2020.11.01

캉탕 / 이승우

13 걷고 보고 쓴다. 한중수는 그것 말고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계획을 세울 여유 같은 것이 없었다. 걷고 보고 쓴다는 것을 계획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긴 하다. 하지만 그 계획은 한중수가 세운 것이 아니다. 걷고 보고 쓸 것. 그것은 그를 한번에 두 시간씩 다섯 번 상담한 J의 조언이었다. 15 J는 말했다. "니체는 하루에 여섯 시간씩, 어떨 때는 여덟 시간씩 걸었다고 한다. 지독한 두통을 잊어보려고 그랬다는 거야. 젊을 때부터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렸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두통이 사라졌다고 하지. 언젠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 자기가 쓴 책 속의 거의 모든 생각들이 걷는 중에 떠올랐다고 고백하기도 했어.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다고 말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하지 않아? ..

후기/책 2020.10.19

스토너 /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16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다른 강사들의 얼굴이나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의 얼굴, 그의 건조한 목소리, 베오울프나 초서의 어떤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깎아내리는 말 등은 항상 스토너의 의식의 문턱에 걸려 있었다. 20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22 그때의 시간은 익숙하게 흐르지 않고 발작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후기/책 2020.10.19

돈키호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안영옥 옮김)

나의 행복을 앗아 가는 자 누구냐? 매정함 그리고 나의 비탄을 늘리는 자 누구냐? 질투 그리고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자 누구냐? 부재 그래서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처방이 없노라. 매정함, 질투 그리고 부재가 나의 희망을 죽이기에. 이 고통을 나에게 주는 자 누구냐? 사랑 그리고 나의 영광을 혐오하는 자 누구냐? 운명 그리고 나의 비탄에 동의하는 자 누구냐? 하늘 그래서 나는 이 알지 못할 병으로 죽을까 걱정하노라. 사랑, 운명 그리고 하늘이 나를 해치기에. 나의 운명을 달랠 자 누구냐? 죽음 그리고 사랑의 행복을 갖는 자 누구냐? 변덕 그리고 사랑의 괴로움을 치유하는 자 누구냐? 광기 그래서 열정을 고치려 하는 자는 제정신이 아니노라. 죽음, 변덕 그리고 광기가 치유의 처방이기에.

후기/책 2020.10.19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로런 엘킨

우리는 개인인가 군중의 일부인가? 우리는 두드러지고 싶은가 눈에 뜨이지 않게 섞이고 싶은가? 어느 쪽이든 뜻대로 하기가 가능하기는 한가? 성별과 무관하게, 우리 각자는 군중 속에서 어떻게 비치기를 바라나? 시선을 끌기를 바라나 시선을 피하기를 바라나? 현저한 존재이기를 바라나 눈에 뜨이지 않고 묻히기를 바라나? 돋보이기를 바라나 무시되기를 바라나? 21 파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되는 때가, 심장이 덜컥 멈춘 것 같은 때가 있다. 나 말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사방이 존재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파리에서 지낸 여섯 달 동안 거리는 집과 목적지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어디든 흥미로워 보이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갔다. 무너져 내리는 벽,..

후기/책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