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책 44

해변의 카프카 / 무라카미 하루키 (번역 김춘미)

문학사상사 (상) 27 세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줄 공간은 - 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 어디에도 없다. 네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그러나 네가 침묵을 구할 때 거기에는 끊임없는 예언의 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가 이따금 네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비밀 스위치 같은 것을 누른다. 네 마음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범람한 큰 강물과 비슷하다. 지상의 표지판이나 방향판 같은 건 하나도 남김없이 그 탁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미 어딘가 어두운 장소로 옮겨져 있다. 그리고 비는 강 위로 계속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그런 장마 광경을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꼭 그대로다, 그게 바로 내 마음과 같은 거야, 하고.78 ..

후기/책 2021.02.20

모비딕 /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60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후에도 나는 많은 재난을 겪었지만, 가장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보다도 그때가 훨씬 기분이 나빴다. 마침내 나는 겉잠이 들어 괴로운 악몽 속으로 빠져든 게 분명하다. 천천히 악몽에서 깨어난 나는 - 아직도 반쯤은 꿈에 잠긴 채 - 눈을 떴다. 63 하지만 실컷 웃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유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그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 게 분명하다. 72 우리..

후기/책 2021.01.26

에리직톤의 초상 / 이승우

45 토요일 오후는 분주함을 가장할 만한 일거리가 없었다. 나는 예상되는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피해 일찍 신문사를 나섰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는 주말 기분에 들떠 쏟아져 나온 인파에 밀리며 이리저리로 무작정 쏘다녔고, 그러다가 다리가 묵직한 통증을 호소해올 무렵쯤 하여, 눈에 띄는 대로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방 귀퉁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서양 노래의 단조로운 리듬에 귀를 개방하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이곳저곳에서 엄습해왔다. 수첩을 꺼내 들고 전화로 불러낼 만한 이름이 있나 찾아보려다 곧 그만두고 말았다. 무의미한 잡담을 견딘다는 건 이보다 더욱 외로운 일인지 몰라. 46 빌어먹을! 부질없는 잡념 끝에 욕설을 만들어 붙이고 갑자기 행선지가 생각났다는 듯 황급히 일어서 버렸다..

후기/책 2021.01.26

파타고니아 / 브루스 채트윈

65 그는 사막의 방랑자들은 자기 내면에서 원초적인 고요함(가장 단순한 야만인들 역시 잘 알고 있는)과 접하곤 하며, 그 고요함은 아마도 신의 평화와 같은 것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87 그는 이 세상이 남들이 얘기하는 것만큼 고약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89 바람이 포효하는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빗발 소리, 테로테로스들이 악쓰는 소리로 밖은 소연했다. (소연: 호젓하고 쓸쓸하다) 128 인디오 한 사람이 산악인들을 잔뜩 노려보더니 그들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었다. 그는 몹시 취해 있었다. 나는 의자에 기대앉아 눈앞에서 전개되는 축소판 남아메리카 역사를 조용하 지켜봤다. 두 산악인 중 한 사람은 30분가량 인디오의 욕설을 잠자코 듣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나 같이 대거리를 했다. 그러고는 욕설과 함께 인디오..

후기/책 2021.01.07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봄날

부제는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하다. 글쓴이는 도대체 어떻게 버텨 왔는가. 123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나는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했다. 143 2차가 빨리 끝나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 미친 듯이 깡소주를 마셨다. 취하기는커녕 더 또렷해지는 내 감정들을 버리고 바다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내 삶이 원망스럽고, 아픈 내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움이 싫었다. 술집 여자로 늙어가는 내 모습이 저주스러웠다. 이대로 바다로 뛰어들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시커먼 바다로 차마 몸을 던지지 못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 죽을 ..

후기/책 2020.12.15

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81 우리가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방이 이미 고유한 배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며, 나 역시 고유한 배역을 맡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역할극의 무대다, 세상은. 98 나는 114에 전화를 걸어 바뀐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132 형의 폐쇄적인 성격(그런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형의 경우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사고가 있기 전에 그는 오히려 적극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편에 속했다)을 감안할 때 어딘지도 모르는 땅으로 영문도 알지 못하는 여행을 감행한다는 건 쉬운 문제일 수 없었다. 145 어머니의 성대에 가시처럼 걸린 말들이 밖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라면 몰라도 어머니에게 주어진, 어떤 뜻으로는 그녀 스스로 받아든 잔을 물리치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성대에 걸린 가시의 실체..

후기/책 2020.12.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 고미숙

7 대체 왜 느닷없이 이런 병이 찾아왔을까? 다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 그 스트레스는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집착과 욕심 때문이라고? 그런데 왜 하필 그 병이야? 이렇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문득 병이 재미있어졌다. 탐정소설을 읽는 듯,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 그리고 차츰 깨닫게 되었다. 병은 저 먼곳에서 우연히, 실수로 들이닥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한 메시지를 들고 찾아오는 전령사라는 것을. 하지만 이제껏 나는 그 봉인조차 뜯어 보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는 것을. 살 만하다,는 게 늘 문제다. 계급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웬만큼 살 만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게 볼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후기/책 2020.12.11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구호 옮김)

39 상복 입은 여자 하나가 시든 꽃다발을 신문지에 싸 들고 있는 열두어 짜리 소녀를 대동한 채 황량한 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모녀는 자신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무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검은 양산으로 작열하는 뙤약볕을 가리고 있었다. 죽은 도둑의 어머니와 여동생으로, 무덤에 꽃을 가져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은 마을 사람 모두가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모녀를 바라보는, 하나의 동일한 꿈의 형태로 그 후 여러 해 동안 나를 쫓아다녔는데, 어느 단편에 그 이미지를 풀어 냄으로써 결국 떨쳐 버릴 수 있었다. 49 "문제는, 우리가 얘를 가르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는데, 법학 공부를 포기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의사는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충만한 재능에 대한 훌륭한 ..

후기/책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