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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탕누어

24 정말로 진실하고 성실한 영혼들은 이러한 분류와 질서의 시스템이 대항할 수 없는 것으로서, 뒤흔들거나 제거한다는 것은 더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마르크스는 최후의 낙관론자였지만 형편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벤야민은 평생 분류되거나 어떤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남들이 주장하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아주 작은 '사적 공간'뿐이었다. 25 위대한 세계 혁명이 이 모양으로 위축되어버린 데 대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벤야민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들의 난처한 처지를 잘 이해할뿐더러 우리 능력의 한계를 동정하고 있으며, 우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추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

후기/책 2020.11.01

내가 책을 읽는 이유

머릿속 혹은 입에서 튀어나오지 못하고 맴맴 도는 어떠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 내 마음에 와닿은 문장을 보면 혹시라도 그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으니까. 책을 읽지 않으면 가슴만 두근거릴뿐 잡고 싶었던 경험의 실타래나 생각의 끝이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그렇게 전부 가슴 사이 사이로 빠져나가 나이가 들어 남는 게 없을 것 같다. 왜 뭔가 남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뭔가가 채워지면 공허함이 사라진다고 기대하는 건가? 그렇다. 단어로, 문장으로 허공을 채우는 느낌이다. 그게 진짜 채우는 걸까, 채워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인 건가.

캉탕 / 이승우

13 걷고 보고 쓴다. 한중수는 그것 말고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계획을 세울 여유 같은 것이 없었다. 걷고 보고 쓴다는 것을 계획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긴 하다. 하지만 그 계획은 한중수가 세운 것이 아니다. 걷고 보고 쓸 것. 그것은 그를 한번에 두 시간씩 다섯 번 상담한 J의 조언이었다. 15 J는 말했다. "니체는 하루에 여섯 시간씩, 어떨 때는 여덟 시간씩 걸었다고 한다. 지독한 두통을 잊어보려고 그랬다는 거야. 젊을 때부터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렸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두통이 사라졌다고 하지. 언젠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 자기가 쓴 책 속의 거의 모든 생각들이 걷는 중에 떠올랐다고 고백하기도 했어.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다고 말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하지 않아? ..

후기/책 2020.10.19

스토너 /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16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다른 강사들의 얼굴이나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의 얼굴, 그의 건조한 목소리, 베오울프나 초서의 어떤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깎아내리는 말 등은 항상 스토너의 의식의 문턱에 걸려 있었다. 20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22 그때의 시간은 익숙하게 흐르지 않고 발작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후기/책 2020.10.19

돈키호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안영옥 옮김)

나의 행복을 앗아 가는 자 누구냐? 매정함 그리고 나의 비탄을 늘리는 자 누구냐? 질투 그리고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자 누구냐? 부재 그래서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처방이 없노라. 매정함, 질투 그리고 부재가 나의 희망을 죽이기에. 이 고통을 나에게 주는 자 누구냐? 사랑 그리고 나의 영광을 혐오하는 자 누구냐? 운명 그리고 나의 비탄에 동의하는 자 누구냐? 하늘 그래서 나는 이 알지 못할 병으로 죽을까 걱정하노라. 사랑, 운명 그리고 하늘이 나를 해치기에. 나의 운명을 달랠 자 누구냐? 죽음 그리고 사랑의 행복을 갖는 자 누구냐? 변덕 그리고 사랑의 괴로움을 치유하는 자 누구냐? 광기 그래서 열정을 고치려 하는 자는 제정신이 아니노라. 죽음, 변덕 그리고 광기가 치유의 처방이기에.

후기/책 2020.10.19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 바이센테니얼맨

전 항상 논리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의 존재에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더 이상 불멸이 아닙니다. 점점 늙어져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처럼 곧 기능이 정지됩니다. 로봇이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원히 기계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고 싶습니다. 그걸 원하는 이유가 뭐죠? 인정받고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가 누구인가 대해 찬사나 평가가 아니라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명예를 걸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I always try to make sense of things, there must be some reason I am as I am. As you can see, I am no longer immortal. I am growing ..

후기/영화 2020.10.17

진짜 가볍게 재밌는거 보고 싶을 때 / 치킨먹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 / 레온 (2018)

포스터를 보고 어떤 이야기인지 살짝 들었을 땐 재밌을까? 싶었는데 오! 연기력이 장난이 아니다. 강지영씨가 정말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거라면, 그러니까 모국어가 아닌데 일본어로 주연 영화까지 찍은 거라면 진심으로 대단한 일이다. 배우 강지영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나는 이 주제면 무조건 옛날 영화 '핫칙'이 떠올랐었는데 이젠 '레온'이 떠오르겠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9286레온Daum영화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movie.daum.net

후기/영화 2020.10.08

넷플릭스 추천다큐 / 소셜 딜레마 (2020)

SNS에 관한 부정적인 면을 듣고 싶다면 이 다큐를 봐야 한다. 실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 래딧, 트위터 등등 우리가 매일 시도때도없이 보고 있는 이 소셜미디어앱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페이스북은 더이상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구라고 하면 스스로 생각하거나 움직이는게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쓰여야 하는 것인데, 소셜미디어앱은 그렇지 않다. 목적이 있다.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 정보를 보여줘서 뭔가를 클릭하게 하거나 구매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다. 그들의 목표는 한 가지다. 광고 수익을 얻는 것. 그걸 위해 소비자학과, 마케팅, 빅데이터에서 공부라고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생각을 심는다. 좀비가 되어간다. 사람을 user라고 부르는 업계는 두 군데 ..

후기/영화 2020.10.08

소설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소설을 읽으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 묘사에 따라서 시대를 느낄 수 있다. 지나가는 전차를 바라봤다던가, 전쟁이 났다던가. 주인공이 머무는 장소로 어떠한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하숙집이던가 원룸이던가, 그 시대를 모르고 글을 읽더라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엔 묘사하는 상황이 그려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 자세히 묘사할 수 있을텐데 소설가는 상상력이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온갖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디테일을 만들어내는걸까. 그래서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는 경우가 있고 정말 경험에서 우러나온 묘사가 있는가 하면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거기서 더 나아가 본인이 경험한 거라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만한 디테일이 나오는걸까. 소설가의 글은 어디에서 나오..

생각거리 2020.10.06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로런 엘킨

우리는 개인인가 군중의 일부인가? 우리는 두드러지고 싶은가 눈에 뜨이지 않게 섞이고 싶은가? 어느 쪽이든 뜻대로 하기가 가능하기는 한가? 성별과 무관하게, 우리 각자는 군중 속에서 어떻게 비치기를 바라나? 시선을 끌기를 바라나 시선을 피하기를 바라나? 현저한 존재이기를 바라나 눈에 뜨이지 않고 묻히기를 바라나? 돋보이기를 바라나 무시되기를 바라나? 21 파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되는 때가, 심장이 덜컥 멈춘 것 같은 때가 있다. 나 말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사방이 존재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파리에서 지낸 여섯 달 동안 거리는 집과 목적지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어디든 흥미로워 보이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갔다. 무너져 내리는 벽,..

후기/책 2020.10.06